1 page 발간등록번호 11-1192366-000014-14 제 9회 등대문학상 수상 작품집 2 page 해양문학과 함께 다시 일상의 바다로.…. 지금 우리는 지난 2년간 우리의 평범한 삶까지 구석구석 제약해 온 코로나19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상작 작품집이 코로나 19로 우울한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3 page 등대 제 9회 문학상 수상 작품집 4 page 제 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변양옥 - 습도 5 page CONTENTS 발간사 울산지방해양수산청장 - 4 축사 울산항만공사 사장 - 6 축사 한국항로표지기술원장 - 8 심사평 시(시조) 이혜선 - 10 소설(단편) 유만상 - 12 수필(수기) 류인혜 - 14 대상 시(시조) 손나래(손석만) 등대의 빛 - 18 최우수상 소설(단편) 신수나 메르쿠리우스의 달 -22 수필(수기) 지영미 해무 - 48 우수상 시(시조) 박복영 등대마을 이야기 - 58 시(시조) 신춘희 습도 - 60 시(시조) 이은서 펭귄의 눈물 - 62 소설(단편) 조계희 고요한 위안 - 66 소설(단편) 백종희 누수 - 86 소설(단편) 김세인 나는 등대섬으로 간다 - 110 수필(수기) 장미숙 바닷바람의 지문 - 138 수필(수기) 진해자 바다의 시간 - 146 수필(수기) 박호선 부표의 귀뜀 -152 6 page 해양문학과 함께 다시 일상의 바다로.… 해양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지난 2013년 5월 제정된 등대문학상의 9번째 공모전을 잘 마무리하고 수상 작품집을 발간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제9회 등대문학상을 빛내주신 수상자 열두 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등대 문학상 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작가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공모전 관리부터 심사, 작품집 발간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수고해 주신 문인협회, 항로표지기술원, 울산항만공사, 울산지방해양수산청 등 여러 기관의 관계자 여러 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올해 등대문학상 공모 결과를 보면서 울산에서 시작한 등대문학상이 지역 문학상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양문학의 등용문으로 위상을 잡아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어서 가슴 뿌듯했습니다 제9회 등대문학상에서는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에 접수된 작품이 총 1049편으로 작년 출품 수 909편과 비교하여 15%나 증가하였습니다. 등대문학상에 대한 작가분들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입니다. 이에 더하여 올해에는 작품 소재의 다양성이 돋보입니다. 바다에서의 추억 과 일상, 해양생물, 해양사고 등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출품되어 해양 문학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는 평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난 2년간 우리의 평범한 삶까지 구석구석 제약해 온 코로나19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상작 작품집이 코로나 19로 우울한 우리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7 page 끝으로 오늘날 등대문학상이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한 측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울산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침침한 회의실에서 정성을 다해 공정하게 심사해 주신 울산 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심사위원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10회 등대문학상에서 더욱 다양한 소재를 통해 다시 열리는 일상의 바다에서 위로가 되고 희망을 주는 해양문학으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2월 10일 울산지방해양수산청장 박용한 8 page 등대문학이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이 되길 사색과 결실의 계절, 가을이 어느덧 저물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습니다. 바다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담아내고 해양의 가치를 키워온 등대 문학상의 9번째 작품집을 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감성과 정신을 언어로 담아내어 우리의 삶을 조명하는 예술입니 다. 등대문학상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으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추억으로 다가 오는 바다를 주제로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을 일구는 창작소 역할을 톡톡히 해왔 습니다. 국민들의 창작열을 불태우고 예술적 소양을 길러주었으며 9년이라는 세월 동안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해양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하여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국제 무역은 위 축되었고 국경이 봉쇄되면서 인적교류 또한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강도 높은 사 회적 거리두기 시행에 따라 가족 및 친구들과의 만남, 문화ㆍ예술 활동에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9회 등대문학상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위드 코로나가 시행됨에 따라 암울했던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등대문학상이 지친 국민들에게 위로를, 앞 으로 나아갈 위드 코로나 시대에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9회 등대문학상을 수상하신 분들에게 축하드리며, 오랜 시간 심사해주신 심사 위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9회 등대문학상을 위해 애써주신 울산지방해양 수산청, 한국항로표지기술원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등대문학상 9 page 에 응모해주신 문학인 여러분과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분에게 해양문학의 진흥 과 문학계의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2월 10일 울산항만공사 사장 김재균 10 page 해양문학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은, 등대문학상 공모전 등대해양문화와 문학이 함께 어우려지는 제9회 등대문학상 공모전의 성공적인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본 대회의 준비부터 심사 및 수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해오신 모든 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자 생존의 토대이며 현재와 미래를 위해 소중하게 아끼고 가꾸어야 할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 옛날 바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고, 경제성장의 토대였으며, 앞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펼쳐질 주 무대로 주목받고 있 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경제, 군사, 문화의 주도권은 언제나 바다와 항만을 지배하는 이들에게 귀속되어 왔습니다. 제국은 해양 패권을 확보함으로써 품고 있던 야망을 이루었고, 바다를 통제하지 못할 때 쇠퇴하였습니다. 인간 사회를 크 게 변화시킨 혁신들은 대개 바다에서 일어났거나, 혹은 바다를 매개로 이루어졌 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바다를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면만 알고 있을 뿐, 바다의 심층은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습니다. 바다를 알고자 할수록 미지의 심층은 더욱 커져만 갈 뿐입니다. 그 깊음과 넓음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인류는 시, 소설, 노래, 영화 등 해양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바다의 미지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고, 바다에 대한 호기심을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양문학이란 주로 바다가 배경이 되거나 주제로 이뤄진 문학이라 정의될 수 있 11 page 습니다. 아직 우리나라 문학에서 해양문학은 낮선 장르지만 세계는 이미 해양문 학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해양문학가는 그 수가 2만 명이 넘고 있 으며,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허먼 멜빌'모비딕'은 여전히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해양문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 9년간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교두보로 자리매김하게 된 등대문학상 공모전 은 인간과 삶 그리고 해양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그 속에 내재된 철학적 아름다 움을 국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으로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해양 문학의 발전적 전승에 힘을 더하고 문학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이제는 어느덧 신인 발굴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시금 본 등대문학상을 통해 걸출한 신인작가 배출과 해양문학의 질적 향상과 함께 해양문화 저변 확대의 성장 동력을 이어가길 기대하며 오늘 수상자 여러분 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2월 10일 한국항로표지기술원장 박계각 12 page 심사평 시(시조) 본심위원에게 넘어온 예선 통과 작품은 50편이었다. 공모전이 9회째여서 그런지 비교적 놓고 고른 수준의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그 중에는 사실의 나열에만 머물러서 상상력이 부족한 작품, 또는 도입부에서 잘 시작하다가 마무리에서 미흡하여 아쉬운 작품도 있었다. 대상 수상작 「등대의 빛」은 바다의 등대와 도시의 '빌당'을 대비시키면서, 등대가 바다를 밝히듯이 빌딩이 도시의 바다에 빛을 뿌리는 본질적 속성을 잘 형상화 시키고 있어서 주목된다. 바닷속에서 생을 영위해아 하는 물고기처럼 도시의 사람 들도 그들의 간힌 생쑤을 영위하기 위해 도시를 헤엄치며 살아가는 모습을 동일시 하여 환치시키고 있다. 우수상 「등대마을 이야기」는 간절꽃이라는 포구를 등상시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피워내는 붉은 동백꽃이야기를 통해 설설한 생의 지느러미를 세워가는 희망과 의지를 노래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다른 우수상 「슬도 뷰」는 생을 소율하고 화음을 맞춰가는 일을 바닷속에 숨어있는 거문고를 켜고 공명하는 일로 표현하면서, 바다와,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승화시키고 있다. 또 다른 우수상 '팽권의 눈물」은 사람들이 삶의 편의를 위해 함부로 버린 것을 때문 에 고통 당하고 죽어가는 바다생물의 신음에 대한 고발과 경고로 읽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삶이 중요하고 감사한 만큼 바다생물 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일늘에 대한 경각심을 지니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작품심사에서는 시적 형상화와 표현의 미적 성취로 주제와 사유의 검이에 유의하여 10 ㆍ제9회 등대문학상 13 page 선정했음을 밝혀눈다. 수상자 여러분께 축하와 함께 더 큰 성취를 기원하며, 선에 들지 못한 분늘께도 다음을 기약하며 분발하시기를 기원한다. 9회째 등대문학상 공모전을 실시해오는 울산지방해앙수산정과 울산항만공사 담당자 께도 감사드린다. 문학의 저변확대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바다에 대해 더 많이 관심 가지고, 이해하게 되기를 빈다. 시(시조) 부문 심사위원 이혜선 14 page 소설(단편) 해양의 무한한 소재, 대작 생산의 자원 될 것 겨울이 긴 나라의 국민이 장시간 야간생활의 이용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까닭에 훌 륭한 작가를 많이 생산해낸다는 통계는, 작금의 코로나 시대가 다시 그 준거로 소환 되게 만늘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역병의 기습과 함께 그 대처 기간이 길고 완전 제압 에 대한 예측 또한 불투명하다는 진단 때문이다. 어썼거나 해양문화의 저변확대나 그 가치의 고양을 지향하며 현재 아기되고 있는 위 기상황의 극복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로서, 『등대문학상』공모를 지속적이고도 야심차 게 추동하고 있는 울산지방해양수산정과 울산항만공사의 문화 부양 의지에는 각별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해양의 무한한 소재는 분명 대작 생산의 주요한 자원이 될 것 이다. 각설하고, 당 기관의 공모요건을 충속시키고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15편이었다. 작품 모두가 나름의 열개와 서사로 독자적인 담몬을 교직해내는 저력이 있음은 인정 하면서도, 소재를 미학적으로 엮여내고 주제를 가슴으로 옮겨 담는 데는 선자6좀)로 하여금 더한 욕심을 보태게 했다. 그중에서 오랜 고심과 저울질 끝에 다시 네 작품을 최종으로 가려내었는데, 끊임없는 세상의 변덕과 가치 전도에 휘둘리는 세태 인심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장인(뚜ㅅ/의 전통의식에만 묶여 사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창출된 작품이, 결국은 아버지의 재현(임을 각성시킨 「'메르쿠리우스의 달」을 최우수 작품으로 정하게 했다. 굳이 명분을 달자면 소설의 전체적 구조가 보다 문학적인 요건에 접근하고 있다는 평가 에서였다. 12 ㆍ제9회 등대문학상 15 page 우수작으로는, 흔한 가족사적인 구도와 더불어 축복과 저주의 이중적이면서 보편적 인 인간 성정 속에서도, 오래 전 아들을 앗아간 해변에서 마주친 부부의 시선이 서로 놀라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이어서 더욱 가슴을 건드리는 이야기로 녹여낸 '고요한 위안」과, 집약과 분열의 의식이 때로는 착란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의식의 흐 름으로 주제를 확상시켜 본 「누수」로, 이 작품은 우선 문장수련의 내공이 느껴지는 데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샌다:는 이치를 파편화된 의식과 상상으로 그려낸 솜씨를 인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렵사리 선정한 작품 「나는 등대섬으로 간다」의 경우 는, 이상향에 대한 현실적 거리의 절감과 전생에 관한 전설을 토대로 한, 꿈의 도전 혹은 선망의 의지를 일부 환타지로 버무려낸 기법을 평가해서다. 세상의 어떤 삭품도 독자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가 없고, 또한 기계적 저울이나 삿대 가 없는 한 그 어떤 심사도 응모자를 철저히 만속시킬 수가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입상자에겐 축하를 아쉽게 선에 들지 못한 응모자에겐 다음 기회를 위해 격려를 보 낸다. 소설(단편)부문 심사위원 유만상 16 page 수필(수기) 제9회 등대문학상 수필부문 본선에 올라온 작품은 서른 편이다. 수필이 바라는 작품의 문학성은 경험의 객관화에 있다. 작품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글감을 담백하고 순수한 정서로 보아야 한다. 쓰는 이가 글의 상황으로 들어가 편히 앉아 서로 동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다 혹은 관련된 소재들은 어찌 보면 먼 추상의 세계이다. 바닷가에서 매일 바다의 싼물을 먹었다 해도 바다의 실체를 전부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경험할 수 없는 듯한 대상을 내 속으로 끌어당겨 글감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형상 으로 창조하는 기술은 문학적 역량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독자에게 고루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쉬우면서도 절제된 문장 사용도 역시 문학의 역량에 속한다. 빼를 까는 아픔과 노력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심사를 하면서 막연할 수도 무심히 흘려보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문장으로 엮어 낸 인내심과 열정이 담긴 몇 작품이 반가웠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해무>, <바닷바람의 지문>, <바다의 시간>, <부표의 귀>은 수준 있는 작품성을 갖추었다. 특히 제목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은 글의 얼굴이다. 주제를 아우르고 이야기의 중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몇 편의 작품은 아쉬웠다. 최우수상 <해무>는 배가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 그 이별을 감당하는 아 버지의 해무는 그리움이고, 다시 작가의 해무는 두려움으로 막막했다. 어두움에 간혀 실체가 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삶의 여정을 잘 그려내었다. 선에 들지 못했지만 어려운 주제를 잘 다듬어서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낸 분들의 노 력에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등대문학상이 오래 불을 밝혀 문학의 길을 가려는 분들 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수필(수기)부문 심사위원류 인 혜 14 ㆍ제9회 등대문학상 17 page 수상작품 대상 시(시조) 손나래(손석만) 등대의 빛 최우수상 소설(단편) 신수나 메르쿠리우스의 달 수필(수기) 지영미 해무 우수상 시(시조) 박복영 등대마을 이야기 시(시조) 신춘희 습도 시(시조) 이은서 펭귄의 눈물 소설(단편) 조계희 고요한 위안 소설(단편) 백종희 누수 소설(단편) 김세인 나는 등대섬으로 간다 수필(수기) 장미숙 바닷바람의 지문 수필(수기) 진해자 바다의 시간 수필(수기) 박호선 부표의 귀뜀 18 page 수상작 19 page 제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김영미 - 어부의 늦은 귀가 20 page 제 9회 등대문학상 대상 당선소감 설마 당선될까? 하는 마음으로, 캄캄한 밤바다에서 배들이 등대의 불빛을 더듬는 심정으로 문학상에 응모했습니다. 지나온 내 삶에서 문학은 꿈이요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시절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도 문학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워 정규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었습니다. 시를 쓰려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50대에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과정을 거쳤습니다. 60대에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학교는 40년의 지각생으로, 공부하는 데 있어서 한숨과 눈물도 흘렸습니다. 주변 시선에서, 늦은 나이에 내가 이 것을 꼭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꿈꾸어온 문학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아들밸 되는 교수나 선생에게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고서 살다보니 환한 등대불빛처럼 나에도 이런 행운이 오는구나 하는 마음에서, 한동안 울컥 했습니다. 입상만 해도 좋다는 마음에서 투고를 했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푸른 가을 하늘이 모두 내 것인 마냥 기쁜 마음으로 물들었습니다. 우선 부족한 작품이지만 선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하는 마음 전합니다. 그리고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가족 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또한 저를 이렇게 문학의 날개를 달게 해준 스승 강희근 교수님과 이승하, 류근, 김영산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당선 메시지를 보냈더니 축하한다는 답장에 가슴이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 신적으로 힘이 되어주고, 기술적으로도 조언해준 j선생님께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손나래 (손석만) 프로필 경남 진주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문화교양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전문가 과정 수료 전, 전주 시내버스 근무. 휴직 수상내역 2011년 근로자 문학상 2017년 월간문학 신인상 21 page 등대의 빛 제9회 등대문학상 대상 / 시(시조) 손 나 래 (손석만) 새벽 등대 빛은 운석의 속도로 마중을 간다 밤새 지친 배들을 향하여, 극의 좌표로, 돌아온 어제의 노을은, 레일을 타고와 만선이 플어놓은 아침 부두에 어슬렁거린다 남름거리는 바다의 혀 속에서 건져 올린 갈치는 아침빛을 자른다 사람들은 심심하지 않을 때까지 바다를 담아 주문을 외운다 어떤 사람은 카멜레온처럼 바다를 사냥한다 갈매기가 안개를 밀치고 기웃거린다 22 page 빌딩이나 등대의 빛은 같은 질량이나 소음이 다르다 등대는 홀로 거리에 서있고, 빌딩은 도시의 바다에 빛을 마구 뿌린다 바다속 플랑크톤을 먹기 위해 몰려드는 물고기처럼, 사람들은 빛 속으로 살기 위해, 죽도록 살도록 죽도록 몰려다닌다 등대의 빛으로는 만선이 들어온다 속에는 빌딩 속 사람들처럼 바다가 네모로 쌓여있다 23 page 네모에서 같힌 사람들, 냉동인간이 아니고 살아서 바다 속 멸치처럼 떼거리로 지하철 해초사이를 헤엄친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으면 바다를 주문하여 오린다 항구와 바다, 수평선은 한통속이다 등대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물컵 안 수평선 아래에도 항구와 바다가 있다 사람들은 등대를 치켜들고 부라보를 외친다 항구를 마시면서 바다같은 소음을 밀어낸다 이 모두가 바다가 생산한 비린내에서 시작되었다 등대가 보는 앞에서 24 page 제9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당선소감 글을 쓰게 된 게 언제부터인가 생각해 봅닌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바닷가 도시에서 였습니다.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 몇 년 동안 살았던 도시, 울산.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에게 해안 도시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생활근거지가 되고 보니 바다만큼이나 아득하고 막연했습니다. 표류하지 않는 삶을 향한 의지는 저를 글로 이끌었습니다. 울산방송의 뉴스 하단에 흐르던 자막. '내 생의 최초의 작가 교실'은 울산의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신청한 도서관 강좌였습니다. 주소지인 울주에서 동구도서관으로 울산을 횡단하며 수강했던 작가 교실, 그 시작으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글을 쓰는 것이 어렵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필연으로 받ㄷ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자꾸 의기소침해지고 뒷걸은치는 제게 울산에서 날아 온 과분한 수상 소식은 문학이라는 항로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폭풍 같은 격려로 들립니다. 울산에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여러 선생님과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현재 함께 하는 설레는 소설반과 김성달 지도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신 수 나 프로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학교 철학과 졸업 수상내역 2016 동서 문학 동화 부문 동상 수상 2018 광주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수상 2020 제64회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 25 page 메르쿠리우스의 달 제9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 소설(단편) 신수나 조개데기를 없는 손끝이 떨렸다. 살을 입히는 작업은 생각보다 까 다로웠다. 물고기 비늘처럼 않게 저민 조개데기는 쉽게 부서졌다. 빈 곳 없이 좀초 붙여가던 서욱은 한 발짝 뒤로 물러셨다. 머리에서 어깨까지 조개데기를 뒤집어쓴 조각상이 형광등 불빛 아래 은은하 게 빛났다. 은빛 피부는 보는 방향에 따라 은회색 혹은 연한 청록색으 로 다채로운 빛을 뽑어냈다. 밤새 조개데기를 갈고 잘라 붙였다. 전등 빛이 미치지 못한 작업장 한쪽엔 깨지거나 가루가 된 조개데기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서욱이 작업대 위로 편편하게 가공된 원패를 올렸다. 실톱으로 가느 다란 선을 따라 신중하게 오려낸 뒤 홍자개 뒷면에 아교를 펴 발랐다. 핀셋으로 들어 올린 자개를 모형의 어깨 부위에 조심스렵게 덧냈다. 26 page 조각상의 일부를 덮었을 뿐인데도 근육의 질감이 생동감 있게 살아 났다. 서서히 드러나는 작품 '영웅'의 면모에 서욱의 입 끝이 만족스럽 게 올라갔다. 핀셋 끝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갖다 대넌 서욱은 흠했다. 아교 한 말은 먹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아버지의 둔탁한 목소리가 건 을 때렸다. 27 page 어린 서욱의 눈에 아버지는 '칼끝을 할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울 칠한 기물에 자개를 끊어 붙이곤 습관처럼 혀로 칼끝을 할았다. 칼끝 에 남아있는 아교를 닭아내는 거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그 위택로움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이되었다. 사양길로 들어선 나전을 잇게 하려는 아버지의 집착은 폭력에 가까 웠다. 그가 집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서욱은 '아버지를 벗 어나는 곳에 자신의 길'이 있다고 믿었다, 잠시 손을 멈줬던 서욱이 다시 핀셋을 집어 들었다. 마감일이 초침 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일일이 핀셋을 낚아낼 여유가 없었다. 서욱은 민첩한 손놀림으로 날이 밝도록 조개께기를 갈고, 오리고, 붙였다. 지미 로렌이 투숙한 호텔에 서욱이 작품을 전시하게 된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미 로렌은 오랫동안 무명 배우 생활을 하다 영화 한 편으 로 스타덤에 오른 할리우드 배우였다. 그는 째나 성실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영화 촬영 내내 함께했던 아내와 휴가 차 호텔에 묵고 있 었다. 물론 서욱은 지미 로렌이라는 배우도, 그가 호텔에 투숙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어렵게 잡은 전시 일정이었다. 동양의 무명 예술가에게 전시실을 주 선해 줄 에이전시는 없었다. 호텔 지배인과 친분이 있는 지인을 통해 사정사정해서 로비에 작품 십여 점을 선보였을 뿐이었다. 그날 조식을 먹으러 1층 로비로 내려온 지미 로렌은 곧장 식당으로 가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간 아내 때문이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28 page 안에서 화장실 세면대에 빼놓은 결혼반지를 용케도 떠올렸다. 아내를 기다리며 지미 로렌은 하릴없이 로비를 거닐었다. 만일 그가 아내의 말대로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라면, 545에 서욱의 작품을 들고 찍은 사진을 올리는 일도, 그리고 서욱이 중국 부 호에게 작품을 의뢰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욱의 작품 '달'은 로비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화려한 조개 겁데기로 겉면을 메꾼 공처럼 생긴 조형물이었다. 전시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호기심에 돌이냐, 알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있어도 선뜻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한 남자가 작품 앞에 팔짱을 채 고개를 가웃거렸다. 말랐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금발의 남자였다. “당신 작품이 말하려는 건 뭔가요?" “사람들은 겉만 보고 안에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요. 빛이 나는 것 일수록 더 그렇죠. 하지만 속은 비어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니에요.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그 안의 소리를 들어 봐야 하죠." 서욱은 남자를 이끌고 귀를 기울이듯 천천히 조형물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내 주머니도 마찬가지지요.” 제자리로 돌아온 서욱이 주머니에서 뻔 양손을 허허롭게 펼치며 웃 었다. 남자가 따라 웃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 그의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남자는 표면을 조개께기로 메꾼 등근 형체를 뜰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구입한 건 귀처럼 생긴 손잡이가 달린 작고 등근 조형물이었다. 29 page 그때 서욱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동양 예술에 관심 있는 서양 남자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지미 로렌은 서욱의 작품을 트로피처럼 들고 찍은 사진을 여띠8에 올렸다. 그것을 본 또 다른 할리우드 배우 제이니 로나가 서욱 에게 연락했다. 그녀 역시 주문한 작품과 함께 찍은 자신의 사진을 여4으에 올렸다. 잇달아 배우들의 5848 인증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셀렵 들이 다튀 작품을 주문하자 서욱은 단번에 유명세를 얻었다. 그 뒤 중국인 부호가 생일을 맞은 부친을 기념한 조각상을 만들어달라며 작품을 의뢰했다. 성공한 사업체를 물려받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존 경심이 상당해 자신의 아버지를 '영웅'이라고 불렸다. 서욱이 이상증세를 느끼기 시작한 건 조각상 영웅에 갈아낸 조개 30 page 데기를 입힐 무렵이었다. 불균일한 조각상의 표면이 몸시 거슬렸다. 그걸 갈아내려년 찰라 머릿속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릿속 뇌피질을 갈아대는 것 같은 지독한 두통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치핑해머들 내려놓고 양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어 꼭꼭 눌렀다. 그러자 머렀속을 찌르년 통증이 조금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그때뿐 이었다. 다시 나무로 된 표면을 갈아내려넌 그가 치핑해머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양손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 리기 시작했다. 병원을 권유하는 아내를 뿌리치고 서욱은 작업실 한구석에 세워 두 었넌 간이첨대를 펼쳤다. 까무룩 잠이 늘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 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섭착제를 발라놓은 것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 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누군가 침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아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뭔가를 스치는 소리, 바람이 일으키는 서늘한 기운, 분주 하고 수선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서욱은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며 가까 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문을 통해 멀리 아내가 작업실에 딸린 간이부억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뭔가를 요리하는지 싱 크대 앞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꿈을 꾸었나, 눈두녕을 짓누르는 피로 감에 다시 눈이 감겼다. 그러자 찬바람이 일며 다시 누군가 침대 주변 을 부산스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눈을 번쩌 따. 순간 서욱은 자신 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과 정면으로 부쳤다. 벌거벗은 남자였다. 허리께에 주황색 천을 아슬아슬하게 두르고 머리 31 page 에는 앙증맞은 작은 날개를 단 투구를 쓰고 있었다. 서욱은 아내를 부 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아무런 기척 을 느끼지 못하는지 이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서욱은 아직도 꿈속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남자가 낮설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아 무리 꿈이라 해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간신히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남자는 대답 대신 히죽 웃으며 몸을 옆으로 비켜셨다. 그가 옮겨 서자 등 뒤에 숨어 있던 그림 한 점이 드러났다. '조각가의 작업실에 있는 메르쿠리우스 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그림은 한가운 데를 들어낸 것처럼 병 비어 있었다. 서욱은 비로소 깨날았다. 그림 속에 있어야 할 남자가 서욱의 침대 맡에 우두커니 서 있다는 걸. 서욱은 이게 꿈이라면 이만 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날라 진 건 없었다. 남자는 그림 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서욱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욱은 남자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떠올렸다. 낭장은 놀라움과 두려움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로맨턱했다. 서욱이 결혼 기념으로 택한 독일의 로맨턱 라인은 아내의 추천 코스 였다. 마인츠에서 본까지 강변 국도를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자동차는 강변도로를 달리며 양옆으로 늘어선 중세의 도시들을 빠르게 스쳐 갔다. 주변을 에워싼 너른 포도밭과 한가운데 서 있는 아남한 고성을 지나 라인강과 모젤강이 합쳐지는 지점이었다. "이 도시에 재미있는 전설을 남은 박물관이 있네. 32 page 휴대전화로 검색하년 아내가 화면을 옆으로 밀며 말했다. 아내는 여행코스에 있는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중이었다. 당신 작품에 영감을 줄 거야, 아내는 그게 서욱을 위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서욱은 아내를 결눈질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인사동 에서 오랫동안 골동품점을 운영했다. 골동품 장사로 잔뼈가 었지만, 돈을 만지자 미술품에도 손을 뻔었다. 나름대로 인사동의 큰 손으로 행세했지만 안타깝게도 장인은 예술적인 안목이 없었다. 골동품이든 예술품이든 가치보다는 돈만 따지다 보니, 걸핏하면 위작에 속아 넘 33 page 어갔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내는 예술에 대한 갈망이 켰다. 불행히도 그녀에겐 예술적인 재능도 감성도 없었다. 고학생에 불과했 지만 조각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서욱을 택한 이유였다. 혹시, 이런 것도 사나요? 골동품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서욱이 내민 것은 그 자체가 보물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보석으로 장식한 작은 나전칠기 함이었다. 한동안 물건을 이리저리 살펴보넌 주인은 산다, 안 산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물건의 주인이 서욱이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는 물건 값을 얼마나 후려칠지 속으로 셈하는 중이었다.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딸은 나전칠기 함보다 서욱 에게 집중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충혈 된 남자 의 눈이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가게 안을 탐색했다. 벽에 걸린 그림들 에 시선이 머문 그의 얼굴은 약간 들떠 보였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물건을 팔기 위해 온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럼을 감상하러 온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목널미까지 붉어졌다. 가게를 찾은 목적을 상기시키자 좁은 어깨가 한없이 내려갔다. 서욱은 더듬더듬 보석함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고 말했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집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서욱은 보석함을 어보며 자꾸 놈을 들이는 주인에게 거듭 말했다. 나전칠기가 가업인 집안에서 조상이 손수 만들어 대를 이어온 물건이라고.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고객 중 돈 많은 유지가 있었다. 그는 가보로 내려오는 보 석함의 자개가 떨어지자 아버지에게 수선을 의뢰했다. 아버지는 몇 34 page 날 며칠을 공들여 보석함을 보수했다. 서욱은 가출을 결심하고 외출한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를 찾았다.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생활비는 어떻게 아르 바이트로 충당한다 해도 한 학기 학비쯤은 준비돼야 했다. 그가 들어 왔을 때 집안은 비어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찾아 마당 한 편에 딸린 아버지의 공방 문을 슬며시 열었다. 오후의 늦은 햇살에 수리를 끝내 고 탁자 위에 단정히 놓여있는 보석함이 현란한 빛을 되쏘았다, 서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듯가로 뛰었다. 배가 출발 고동을 울럴 때야 가방을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이 풀리고 배가 바다 한가운네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서욱은 무심코 부듯가로 고개를 돌렸다. 숨이 턱에 낳도록 달려온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막 출항 한 배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당장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날음에 배에 올라 서욱의 명살을 틀어 것 같았다. 서욱은 사람들을 틈에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35 page 아버지의 눈과 서욱의 눈이 정면으로 부쳤다. 형형했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다 탄 재처럼 흑 꺼졌다. 노기 떤 얼굴도 무표정 하게 굳어졌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리려넌 두 팔도 맥없이 떨어뜨렸다. 그대로 정지였다. 파도를 밀어내는 거센 바닷바람도 그를 뒤로 물러 서게 하지 못했다. 해변 끝에 서 있는 등대처럼 움직임도 흔들림도 없 었다. 서욱은 서울로 올라온 뒤로도 아버지가 여전히 거기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코블렌츠라는 이름을 딴 간판들이 흘러 갔다. 아내가 말한 박물관이 있다는 코블렌츠였다. 서욱은 선글라스 너머로 아내를 바라보며, 결혼 10주년 기념인 이번 여행은 그녀가 원 하는 대로 하기로 한 걸 애써 되새겼다. 아내가 말했던 재미있는 전설이란 박물관 안에 걸린 시계에 있었다. 시계 하난에 사람 얼굴 형상의 우스팡스러운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아내는 조각만큼이나 전설 또한 재밌다, 며 이야기를 전했다. 오래 전, 도둑질하다 체포된 한 남자가 교수형을 낭했다. 죽기 전 남자는 "내 얼굴을 광장에 걸어두면 이 지역이 크게 번영할 것이다 라는 말 을 남겼다. 호기심 많은 후대의 누군가가 그의 유언에 따라 시계 밑에 익살스러운 도둑의 얼굴 조각해 날았다. 그 덕분인지는 그 뒤 코블렌 츠는 라인강에서 손꼽히는 상업 노시가 되었다. "우리도 도둑 얼굴 조각상이나 하나 사갈까? 당신 작품 좀 잘 팔리게." 뭐는 논과 연관시키는 아내의 말에 서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불쑥불쑥 장인의 모습을 보일 때면 그는 그녀와 결혼한 걸 후회 했다. 하지만 36 page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그가 미대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내의 덕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골동품 점에서 아르바이트했지만, 아내가 없었다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뒤 다학을 졸업하고 자연스럽 게 아내와 결혼했다. 당시의 그로서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인사동 거리 에서 골동품점이 하나둘 사라져도 장인이 그 자리를 꽃꽂이 버던 것처럼 그의 아내 역시 그의 옆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난 예술을 하려는 거지 물건을 팔려는 게 아니야. 골동품 점을 운영하 라는 장인의 집요한 요구를 거절하고 나올 때처럼 서욱은 자리를 박차 고 나왔다. 그리곤 홀 바로 옆에 있는 전시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서욱은 거친 유화의 질감이 살아있는 회화 앞에서 걸음을 멈춰다. 제목은 `조각가의 작업실의 메르쿠리우스'였다. 고대 조각가의 작업실 이라는데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별다른 건 없 었다. 전신 조각상 하나와 선반 위 흉상만이 그곳이 조각과 관련된 작 업장 풍경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특이한 것은 메르쿠리우스라는 인물 이었다. 해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미아의 아들이었다. 로마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 그리스어로는 히르메스로 불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벌거벗고 있었다. 전체 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벗은 황갈색 몸이 달처럼 빛났다. 허리 에 휘감은 주황색 천 조각과 머리에 쓴 작은 투구가 걸친 것의 전부였 다. 그는 신의 심부름꾼이고 부와 행운의 신이었지만 도적의 수호자가 되기도 했고, 좋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사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하필 조각가의 작업실에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37 page 최우수상 38 page 서양의 미술작품 속에서 신들의 모습이 벌거벗은 채 등장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서욱의 눈엔 그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전시관을 나온 서욱과 아내는 소라고둥 속처렴 빙글빙글 돌아 내려 가는 계단을 내려가 기념품 판매점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장난스럽게 도둑얼굴조각의 기념품을 집어 들었고, 지 못마땅해진 서욱은 '조각 가의 작업실의 메르쿠리우스'의 복제화를 집어 들었다. 순전히 아내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와 까망게 잊고 있었다. 정작 그림 속 남자를 불러온 것은 아내나 다름없었다. 액자 속에 넣어 작업실 벽에 걸어 놓은 건 뒤 늦게 짐을 정리하던 아내였으니까. 그 뒤 서욱을 포함해서 벽에 걸린 그림에 눈길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 메르쿠리우스가 몇 년 만에 그림 속을 뛰쳐나와 서욱 앞에 서 있다. 그러고 말을 걸었다. 그는 서욱이 누워 있는 침대 주변을 빙글빙글 맵돌았다. 투구의 작은 날개를 쉼 없이 파닥여 공증을 둥둥 떠다녀. 서욱은 그의 여러 역할 중 하나가 죽음의 신이라는 걸 떠올렸다. “지금 당장 날 데리고 저승으로 갈 건가요?” 서욱이 머릿속을 맵도는 말을 내밴었다. “무슨 소리?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서욱은 그의 말이 자신의 할 일이 남았다는 건지 남자의 할 일이 남 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자신이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조각상 '영웅"을 완성하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의 말처럼 할 일을 찾아갔는지 어느 틈에 사라졌다. 그 뒤로 남자는 특하면 그림 속에서 튀어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39 page 그럴 때마다 서욱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통증을 겪었다.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나될었다. 그걸 본 메르쿠리우스는 천천히 손을 뻔어 서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안개가 건히듯 두통이 말끔히 사라 졌다. 그런데 메르쿠리우스가 나타나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한 주 에도 몇 번이나, 심할 때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나타났다. 그는 작업실을 배회하기도 하고 서욱의 작업에 참견하기도 했다. 얼 마나 남았지? 아직이야? 특 특 던지는 그의 말은 서욱의 죽음을 재촉 하는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서욱은 아무 말 않고 작업에만 몰두했 다. 그러면 메르쿠리우스 역시 그의 작업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러다 종잡을 수 없는 등장처럼 어느 순간 연기처럼 흑하고 사라졌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조각상 '영웅'은 어느새 상반신을 은색 갑피로 휘감 았다. 조개꺼기로 덮일 때마다 묘하게 변해가는 조각상의 분위기 에 서욱을 놀라곤 했다. 그것은 메르쿠리우스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억눌렸던 기역이 증폭되어 만들어내는 환영인지도 몰랐다. 서욱은 메르쿠리우스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 과 함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집을 나온 뒤 수년 만에 찾은 고향이었다. 시내 골목 안에 있던 아버 지의 집과 공방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뒤였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본 아버지의 새집과 공방은 헐벗은 들판 위에 가로로 누워 있 었다. 초록색 슬레이트를 없은 낮은 집과 기역자로 연결된 비닐하우스 40 page 같은 둥근 지붕의 창고였다. 마당 한옆엔 흙을 새로 갈아옆은 흔적이 있었다. 빈터에 어머니가 푸성귀라도 가꾸려고 일군 벗밭으로 보였다. “아버 지 는?” 서욱이 어머니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어머니는 둥근 지붕의 창고를 가리켰다. 공방이 아닌 수선소라고 말 했다. 한때 장인이었던 아버지는 더 이상 나전칠기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자개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들었던 물건들을 이제는 고치는 처지가 된 아버지라니, 서욱은 충격이었다. 나전칠기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공방을 수선소로 바꿔 생계를 꾸리는 건지, 아들이 홈쳐 간 지역 유지의 가보를 물어주느라 공방을 팔아 버린 건지, 그는 묻지 못했다. 세월의 흐름에 망가지고 부서진 건 자개장롱이나 나전 칠기 함만이 아니었다. 수선소 벽을 둘러 기다란 판자 십여 개가 겹쳐 서 있었다. 어디가 문 인지 분간이 안 됐다. 간신히 판자 사이에서 닫힌 입구를 발견하고 남 은 창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멘트 바닥 위에 미닫이문으로 분리 해 놓은 두 개의 방이 보였다. 공방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술 자 두 명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둔하고 느 렀느릿한 움직임은 그들이 손보고 있는 물건만큼이나 남아 보였다. “여전하시네요.” 서욱은 누구에게라도 할 것도 없이 말을 던졌다. 아버지가 여전하다 는 말인지 그들이 하는 일이 여전하다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제 본 아들을 오늘 본 것처럼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상자들이 에워싼 좁은 탁자에 고개를 숙이고 전복 데기를 41 page 17세기에 조각된 메르쿠리우스상 42 page 잘라내 원자재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울퉁불퉁한 꺼기에서 평 평한 부분을 잘라내는 작업이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수듯가에서 모아 온 전복 께기를 고 있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일들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한참 만에 서욱을 마주 보고 앉은 아버지가 말했다. 좀 전에 수리소 를 들어서면서 서욱이 던진 말에 이제야 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서욱 이 아버지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면서 지켜본 과정도 여전했다. 아버 지는 공방에서 수선소로 이름만 바끼 하는 일은 같았다, 여전히 화학 도료 대신 웅칠을 했고, 단가가 싼 판자개 대신 원패를 썼다. 기계가 아닌 실톱으로 일일이 원패를 오려 장롱의 떨어져 나간 달을 붙였다, “고작 수선하는 일에 만족하고 계신 거예요?" 아버지의 달을 바라보며 서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자개를 만질 수 있어 좋다, 난." “도대체 뭘 위해 그 힘든 일을 하는데요?” 서욱의 물음은 아버지에게라기보다는 대상 없는 존재를 향한 항의에 가까웠다. “수선일이라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목덜미로 굴은 방울이 굴러 내렸다. 아버지는 더는 지체 할 수 없다는 듯 느닷없이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돌연 웃웃을 훌렁 훌렁 벗어 던졌다. “예전에는 완전히 발가벗고 했지.” 먼지 한 올이라도 될세라 울칠한 가구 사이를 재바르게 누비는 아버 43 page 지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보였다. 땅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몸이 새것처럼 광을 낸 자개장처럼 반들거렸다. "많은 빛을 갖고 있는 게 조개다. 그 자체로도 환상적인 그림이 되지" 날을 품은 장롱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서욱의 등 뒤에서 아버지의 목 소리가 파도처럼 부서졌다. 돌아다보니 아버지의 눈 속에도 바다를 담은 빛이 튀었다. 그 빛은 올가미가 되어 서욱의 목을 감아 끌어당길 것 같았다. 서욱은 자신도 모르게 수선소를 뛰쳐나갔다. 아버지의 혀끝을 위협 하던 칼날이 서욱의 머리 위에서 번득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서욱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이었다. '영웅"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다. 서욱은 작업실 안에서 쓰러졌다. 마감일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꼬박 이틀 밤을 44 page 새우며 작업에 매달린 뒤였다. 식욕이 없어 아침도 변변히 먹지 않은 그를 위해 점심도시락을 싸 온 아내가 조개더미 위에 쓰러진 서욱을 발견했다.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는 그를 확인한 아내는 조개데기 가 쌓여있넌 수레를 비워내고 서욱을 태웠다. 119를 부르라는 남편의 말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며, 자동차가 세워진 마낭으로 수레를 끌었 다. 아내는 최단 거리에 있는 병원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서욱의 몸 이곳저곳에 청진기를 대보년 의사가 물었다. "최근 몸에서 이상 증세 같은 거 못 느껴요?" "계속 두통과 구토 증상이 있었어요." 메르쿠리우스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놀란 아내가 당장 작업을 중단시킬 게 뻔했다. “통 먹질 못했어요. 원래 작업할 땐 잘 먹지 않긴 하지만." 아내가 옆에서 덧붙였다. 의사는 스트레스와 기력이 약해진 탓이라며, 주사와 약을 처방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가옷했다. 원인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다는 얼굴 이었다. 그 뒤로도 서욱은 아내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작업실 바낙이 나 조개더미 위, 집 거실에서도 바닥을 두는 일이 찾아졌다. 서욱은 아내가 이끄는 대로 여러 진료과를 전전했다. 처음엔 내과, 그다음엔 호흡기과, 신경외과까지. 그가 조각한나는 말에 의사들이 혹시 유독 물질이 포함된 재료로 작업하지 않냐고 물었다. 서욱은 고 개를 저었다. 예전 선배 조각가 중에 간혹 화공약품을 잘못 써 중독된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진 후 재료에 중금속이나 유해물질 여부는 조각가들 사이에 민감한 일이 되었다. 45 page 단순한 과로로 인한 소화기 장애로 진난받고 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서욱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 려 섬해졌다. '영웅 의 다리를 덮을 전복 데기를 잘라 불인 후였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가 쑤셔왔고, 사포를 손은 벗벗해지기 시작했다.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데……. 옴짝날쌍 도 못 하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서욱은 그 걱정만 했다. 작품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서욱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손에 는 치핑 해머를 보고서야 좀 전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겨우 깨달았다. 하지만 작품의 어느 부분을 손봐야 하는 건지, 다음에 뭘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요 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어디가 어던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욱은 작업실 문을 열고 마당을 서성이며 전화를 걸고 있는 아내에 게 큰 소리로 물었다. 화장실을 찾을 수 없다고. 아내가 통화하려다 말고 귀에 됐던 핸드폰을 허리 부근으로 내렸다. 그리고 이상한 눈으 로 그를 쳐다봤다. 더는 몸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이 멈추고 판단능력이 사라지고 있 었다. 서욱은 재료를 손질하는 것도, 조개데기를 간난히 옮겨 붙이는 것도 어려웠다. 어떤 때는 조겁데기 위에 조개데기를 겹쳐 붙이기 노 하고 붙인 걸 몽땅 듣어내기도 했다. 메르쿠리우스의 농간 때문이었다. 작업장 벽에 걸린 그림 속 메르쿠 리우스가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게 시작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욱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작업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불러도 메르쿠리우스는 나타나지 않 46 page 았다. 우악스럽게 그림을 벽에서 떼어냈다. 두 손으로 높이 들어 바닥 에 내동냉이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림 속 메르쿠리우스가 아버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완성한 영웅 또한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서욱은 그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림을 바낙으로 내동냉이쳤다. 액자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가 뛰어 들어왔다. 그가 화장실 이 어던지 묻은 것 이상으로 놀란 아내가 서욱을 다시 병원으로 데려 갔다. 이번엔 정신과였다. 의사는 우울증약과 진정제를 처방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욱은 자신이 왜 이렇게 괴상망측한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 다. 검사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의사는 유독물질 중독을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욱은 자신이 독성물질에 중독되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우선 그는 유독물질에 중독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남해안 연안에서 채취한 조개와 홍합, 전봅데기를 일일이 갈아 사용 했고, 아교도 직접 끌여 썼다. 그의 아버지가 했넌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치매도 파킨슨도 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의 증세들은 유독물질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했다. 의사도 의아해 하는 부분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서욱이 약을 먹고 잠들자,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갖은 그의 아내는 거실로 나가 1*/를 켰다. 어릿광대처럼 알록날록한 가운 47 page 을 입고 커다랑고 우스광스러운 안경을 쓴 두 남자가 화면 속에서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의 별별 뉴스와 사건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이었다. '어떤 죽음 이란 코너에 골프장에서 죽은 한 남자의 사건이 소 개되었다. 남자는 티삿한 뒤 습관적으로 잔디에 꽂았넌 티를 빼서 입에 물었다. 초조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고, 골프가 잘 되기를 속으로 기원 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그는 드라이버를 날린 후 공을 올려 놓기 위해 꽂았넌 티를 빼서 입에 무는 행동을 계속했다. 그는 18홀 중 15홀을 놀다 쓰러졌다. 사인은 농약 중독이었다. 수일 전 골프장에 대대적으로 농약을 살포한 게 원인이었다. 진행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방송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것이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 17*/를 끄고 미뤄될던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거실 을 가로질러 부억으로 향했다. 남편이 깨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간단 한 요리를 끝내고, 짧은 외출을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마당에 별채처럼 딸려 있던 작업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처음엔 제대로 날아두지 않았나 했다. 곧바로 몸이 아픈 남편이 낭분간 들어 갈 일이 없을 것 같아 문을 잠가 났던 게 생각났다. 혹시 도둑이 는 게 아닌가 해서 손안에 핸드폰을 곽 채 안을 엿보았다. 순간, 그녀는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자고 있을 줄 알았넌 남편이 조각상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조각상 발치에 무릎을 꽃고 앉아 있었는데, 한 손에는 자개 조각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놓인 통 속에 칼을 남갔다. 그리고 자개 뒷면에 칼로 아교를 묻혔다. 아내는 쉬고 있어야 할 사람이 몰래 48 page 나와 작업을 하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그러나 정말 놀랄 일은 그다음 에 벌어졌다. 서욱이 조각상에 자개를 붙이더니, 칼날에 남아 있는 아교 를 재빨리 혀로 옮었다. 마치 카멜레온이 긴 혀로 파리를 낚아채듯, 능숙하고 민첩한 동작이었다. 여자의 머리 위로 입에 티를 무는 골프장 남자의 환영이 빠르게 지나 갔다. 그녀는 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조럽식 벽이 울리고, 창문이 흔들렸다. 서욱이 두 번째 칼 놀림을 한 뒤였다. 그녀가 달려가 남편의 팔을 잡아을 때는 이미 세 번째 칼이 아교 통을 휘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양 팔을 거세게 잡아 흔들었다. 그래야만 남편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점작할 수도 없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여자는 남편에게 서 아교 통을 빼앗아 작업실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서욱은 아내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루로 된 아교를 불 위에 올려놓고 끝이는 일은 꽤 번거로웠다. 서욱은 아교를 직접 만들기를 고집했다. 그 일을 대신 하겠다고 나선 건 아내였다. 조개를 갈고 붙이는 남편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 려는 그녀의 배려였다. 작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뜨거운 불 앞에서 아교를 날이는 일은 고역이었다. 꼼짝없이 불 옆에 지키고 서서 바닥에 날라불지 않도록 꿈는 내내 저어주어야 했다. 그녀는 아교와 같은 색깔과 같은 질감과 같은 성능의 합성 접착제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접착성이 좋아 특허까지 받았다는 광고가 왕관 처럼 붙어 있었다. 49 page 병원에 있는 서욱 앞에 메르쿠리우스가 나타났다. 그는 서욱의 손을 잡고 투구에 붙은 작은 날개를 파닥여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들이 멈춘 곳은 서욱의 아버지가 서 있던 바닷가였다. 그곳에 서욱을 내려놓은 메르쿠리우스는 그를 향해 잠시 웃어 보이더니 어눔을 뜰고 나온 둥근 달 속으로 폼당 사라졌다. 홀로 서 있는 서욱에게 세찬 바람이 바닷물을 끼없고 달아났다. 달빛 에 그의 몸이 은색 갑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반짝였다. 50 page 제9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당선소감 자욱한 안개가 골짜기를 감싸는 날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안개는 저에게 그리움입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바다를 찾습니다. 질은 해무 속 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수십 번의 퇴고 속에 서 당신의 삶을되새겨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쓰기는 저의 삶에 있어 많은 것과 화해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인생 후반기 글이 나에게 소중한 벗이 되기 를 다짐해 봅니다. 여전히 잡힐 듯 말듯 한 씨줄과 날줄이 저를 애타게 합니다. 하지만 틀들 털고 일어설 때의 그 희열을 알기에 더 정진해 보려 합니다. 당선 소식은 언제든 소중하고 흔흔합니다. 험준한 고개를넘고 있는 저에게 큰 용기가 될 것입니다. 저의 작품을 선택해주신 심사 위원님과 울산지방해양수산청 관계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언제라도 읽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지도해주신 곽 교수님과 함께한 문우들, 그간 배려 해주신 고귀한 이름들 잘 기억 하겠습니다. 지영미(지이재) 프로필 울산광역시 출생 청도 공공도서관 수필반 회원 고등학교방과후 영어강사 수상내역 2021년 경북 문학체험 전국 수필대전 동상 제5회 포항 수필에세이 공모전 동상 51 page 해무 제9회 등대문학상 최우수상 / 수필(수기) 지영미 희뿌연 안개가 몰려온다. 모든 존재를 다 삼켜 버릴 듯 일순간에 덮 져온다. 이으고 낮선 길을 마주한 나를 막아선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 하나에 오감을 의지하늦 온몸의 촉수를 곧추세운다. 한 치 앞의 사물도 자하다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봄이면 자주 출몰하는 안개는 새로운 곳에서 막 보금자리를 튼 나에 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날려들었다. 세상이 본시 이랬었던 것 마 냥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의 본능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해 낸다. 눈과 발이 묶인 지금 낮은 소리라도 들으려는 생존 본능이 한껏 살아 움직인다. 52 page 제1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최남순 - 소매물도 53 page 때론 그렇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작 은 어촌 가까이 있는 역사($숨)까지 파도 소리가 들리진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바다에 중요한 그 무엇을 두고 온 듯 근처를 맵놀았다. 이 그 때를 생각하면 마치 바다가 지척에 있어 바람에 찜찔한 냄새가 묻 어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어촌마을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고깃배 선장이 셨던 할아버지는 해무 속에서 길을 잃고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탐지기 하나 없이 물색만 보고도 고기떼를 예견하 셨다는데 정작 해무는 예측하지 못하셨던 것일까. 뒤이어 형마저 사고 로 돌아가시게 되니 아버지는 가족의 반을 잃는 슬픔을 감내해야 했 다. “그날 징그럽게 온 바다를 덮었넌 기라. 그리 지독한 해무(#8)에 뱃길을 찾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던 게지!" 아버지가 얼큰히 취하신 날 이면 어김없이 그리움과 한을 남아 꺼이꺼이 쏟아내셨던 말이다. 심연 저 밑바낙에서 따리를 틀고 앉아 있는 원초적인 외로움이 늘 아버지를 따라다다.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시절,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진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일은 어린 아버지가 감낭하기엔 너무 큰 짐이었을 게다. 아버지는 도시에 있는 역을 마다하고 작은 어촌마을 역사로 전근을 하셨다. 연어의 회귀처럼 바다로 돌아가 그 시절을 마주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실루옛을 붙잡아 두려는 몸부림 이었을까. 아니면 수없이 침묵을 강요당해 온, 곰삭은 응어리 54 page 를 위로 받으려 했던 것일까. 낭신의 지난한 삶 속, 혼자 감낭하기 어려 워 발길이 거기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질은 해무가 드리우는 날 이면 바다로 나가 하염없이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넌 아버지의 뒷 모습이 생각난다. 해무는 어쩌면 아버지에게 물리쳐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무의식에 잠재된 그리움의 촉매가 아니었나 싶다. 어쩌다 아버지가 숙직하시는 날이면 저녁 배날을 갔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해무가 여지없이 뒤덮이곤 했다. 아직은 익숙지 않 은 길을 더듬더듬 헤치고 가면 손에 땅이 자작하니 차올랐다. 바다 냄새가 가까워지면 목적지가 지척에 와있다는 암시였다. 마침내 손전등 불빛이 어슴푸레 비치고 동생과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옥고 아버지가 장막을 헤치고 나오면 이 모든 시름이 끝나 는 순간이었다. 역사 옆 숙소에서 늦은 저녁을 드시고 나면 우리 자매 는 다시 안개 속으로 묻혔다. 외롭게 자란 아버지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눌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간신히 마음을 연 이웃에게 속아 금전 손실을 본 이후로 철 저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물설고 낮선 곳에서 새로운 둥지를 튼 우리 가족은 마치 해무 속에 감힌 한척의 배 같았다. 상실감에 빠진 아버지는 더 자주 바다를 찾았 다. 할아버지가 해무 속에서 길을 잃고 좌초될 순간의 두려움을 고스 란히 느끼고 계셨던 것일까. 통제력을 상실한 선장은 선원과 배를 감당 해내기엔 힘에 부쳤다. 걷어내어도 헤쳐 내어도 끊임없이 뒤덮어 버 리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악마의 손길이 끝이 없을 것처럼 드리웠었다. 55 page 해무는 무섭게 다가와 온천지를 삼키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리를 감춘다. 그 순간을 넘기면 살아남을 수 있다. 삶이 그러했다. 햇빛이 한 자락 비치기 시작하면서 마성의 손길이 요술처럼 사라져 갔다. 우리 형제는 서서히 걷히는 안개와 함께 성장해 아버지를 하나 둘 떠나왔다. 학업을 마치고 가정을 이루고 그렇게 작은 어촌마을 역 사(숨)의 기억도 어졌다. 그래서인지 안개는 낭만적인 그 무엇이 라기보다는 나에겐 애증의 대상이다. 나의 삶에도 해무가 질게 드리워졌었다. 수출길이 막힌 남편은 강에 서 제월만 낚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오종종한 눈망울을 보면서 전 사가 되어야 했다. 그 시절 일찍 떼어 놓은 막내의 울음소리가 이명처 럼 귀를 울렸다. 생활전선에서 장막을 헤치며 진군 할 때면 문득 아버 지의 전철을 밝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한없이 지칠 때면 홀연히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해무를 거두며 가만 히 내손을 잡아주던 따스한 손길을 지척에 있는 듯 느껄다. 아버지가 힘든 여정을 무사히 헤쳐 나왔듯 분명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 신을 얻었다. 나에게 드리운 해무를 수없이 걷어내자 뿌연 안개는 서서히 사라지 고 햇별이 골목 깊숙이 들어왔다. 무사히 잘 성장한 아이들은 제 묶을 하러 떠나갔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서늘한 허기가 찾아오면 바나를 찾았다. 남편의 쓸쓸한 뒷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등이 중첩되곤 56 page 했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의 실체가 안타까움과 그리움이었음을 깨닫 게 되었다. 비굴하게만 보였던 당신의 모습이 더 나은 걸음을 위한 쉼 이었다는 것을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원망이 짜함과 미안함으로 가슴이 먹먹해 왔다. 질은 안개가 앞을 가로 막아서면 뿌리의 깊이도 우듬지의 높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안개가 떠나간 자리에 초라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내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무는 할아버지를 삼켰고 아버지와 나의 인생에도 파고들 었다. 절대 떼어 낼 수 없는 숙명의 존재라는 것을 당신은 바다에서 57 page 아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일찍 철이 들었다. 내가 힘들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듯 아버지도 바다에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더듬어가며 해답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해무 속을 들어가면 모두가 혼자다.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듯 두려움이 몰려온다. 은 세상이 환할 때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싶은 어돔만이 버티고 있다. 모든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날 때 까지 처 절하게 싸우는 것만이 살길이다. 사람은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태어 났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질곡이 바닥을 치면 남은 것은 올라오는 것 밖에 없다. 아무리 좁고 어눔으로 짝 찬 콜목이라도 막다른 길은 없 다. 뜰고 나아가면 흰한 길이 나타난다. 곳곳에 숨었던 회색 장막이 사라지자 멀리 마을이 희미하게 드러난 다. 무디어진 손과 발을 살려 내어 휘이" 저어 본다. 변한 것은 없어 보 인다. 다만, 단단해진 내 발걸음만 달라졌을 뿐 58 page 시(시조) 59 page 제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이효옹 - 암초와 등대 60 page 등대마을 이야기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시(시조) 박복영 몸에 밴 비린내가 동백꽃을 피웠다 좌판에 말줄인표로 늘어선 함지 따라 괴어나는 아낙들의 사투리에 꽃물이 든다. 비린내처럼 파도가 밀려드는 동안 지느러밀 세운 생들이 푸득, 거리며 골목을 헤엄쳐 다닐수록 붉어지는 꽃. 동백 은비늘의 생물들이 길을 묻는 듯 굽은 등일 펼쳐내마다 허탕 없는 물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쓸쓸한 기다림을 끌어안아야한다고 꽃잎을 세운다 61 page 꽃잎은 찌지는 통증으로 꽃 향을 품었을 터 몸빼에 밴 비린내가 생의 지느러밀 세우고 있다 파도가 발자국들을 끌며 쏟아지고 삐툴삐툴한 지붕 낮은 집 지붕을 따라 말라가는 가오리며 박대가 마을길 골목을 환히 밝히고 비린내로 피운 꽃은 다시 통증으로 단단히 여무는데 간절곶은 소망우체통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다. 몸에 밴 비린내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포구 젖은 장화가 지느러미로 일어서고 목장갑이 은비늘들로 돋고 동백꽃은 다시 붉어지고 있다 62 page 슬도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시(시조) 신춘희 저 바다 속에는 숨어있는 거문고가 있다 파도가 드나들 때마다 흥겨운 가락이 묻으로 오른다 거센 파도가 시시각각 돌쾌를 조인다 너울성 파고가 화음의 주인일 때도 있다 바다를 팽팽히 죄었다 풀며 되새김질하는 현악기도 공명통이라고 동기덩 당당 누군가 거문고를타고있다 현을 짐는 하루하루가 줄을 튕겨 해조음을 연주하듯이 63 page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을 눌러 여생을 조율해야 하는 법 화음을 찾아 문 안쪽과 물 밖을 넘나드는 바람 파도를 물고 나르는 바람에 귀를 열어 해무 한 곡 가만히 듣는다 종일 그치지 않는 너울 술대를 밀고 당기던 그 현란한 기교에 며칠을 묵게 되듯이 물길을 따라온 약보들이 모두 이곳에서 리듬이 된다 등대에 다시 불이 들어오면 밤하늘 수만 개에 구멍의 합창으로 별빛 후렴이 흘러나온다 하양게 부서지는 저 여음 그 청량한 떨림이 수평선까지 번져가는 섬에 온 사람들 모두 관객으로 화답한다 64 page 펭귄의 눈물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시조 이 은 서 바다엔 눈동자들이 걸어 다닌다 왜, 반쯤 가린 얼굴들만 떠다니고 있는가 표정은 없고 눈동자만 해변을 거닐고 있는 것일까, 얼굴을 반쯤 가린 것들은 어두침침하다 눈알만 굴러다니는 길들은 자꾸 내게 고개를 떨구라고 속삭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눈을 열어 듣는다, 아직도 남은 젯빛 날들 원래 사라진 것들은 안타까운 것들이니까 백사장에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들 속, 어린 평권의 눈동자에 고였던 눈물이 따라온다 뉴스 앵커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한 장면 “이것 좀 빼 주세요“ 65 page 코에 꽂힌 붉은 빨대 하나, 겁도 없이 결어올 때 뒷걸음 치던 카메라가 떨고 있었다 우리가 함부로 버린 것들의 절규 바다는 끝내 침묵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저 너머의 세계 죽어가는 것들의 신음을 듣는다 펜 위에 클로즈업되는 바다의 눈물 마지막 경고일까, 무거운 발자국 모래 위에 남기고 들아서는데 입을 가린 얼굴들이 여전히 걸어 다닌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위독한 그림자 얼핏, 함부로 버려진 모든 것들은 위협하다고 물이 밸어낸 바다의 속내, 목숨을 다한 것들은 묻으로 나와 죽는다는 것을, 입을 가린 지난 시간의 오류에 대해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고 돌아간다 66 page 소설(단편) 67 page 제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공희선 - 초록색등대 풍경을 만들다 68 page 고요한 위안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소설(단편) 조계희 아들의 기일 이틀 전에 며느리 연주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 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이번 기일에는 참석하지 못할 일이 생겼거나 기일에 관련된 다른 계획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로 가는 동안 나는 몸에 한기를 느낄 정도로 불길한 예감에 싸였다. 약속 장소인 ]호텔은 십년 전 상견례를 했던 장소였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것이 카페인데 하필 죽은 남편과 상견례를 한 장소에서 시어 머니를 만나자고 하는 것에 왜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연주는 작년에 손자 정우를 미국에 있는 제 언니에게 보냈다. 의사 부부인 언니네는 아이가 없었다. 그들은 정식으로 정우의 후견인이 됐다. 정우가 영영 남의 자식이 된 것만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연주 69 page 에게는 내색하지 않고 정우는 미국에서도 잘 적응하고 성공할 거라고 덕담을 해 주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j호텔 건물은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며 변 함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j호텔은 다른 고급 호텔들과 날리 무람없이 드나늘 수 있는 친근감이 최대 장점인 호텔이었다. 커피숍에 입구에서 창가 자리에 앉은 연주가 바로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이브가 풍성한 긴 머리는 어깨에서 찰랑거렸고, 크림색 블라우스와 청보빛 주름 스커트가 잘 어울렸다.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가 연주를 한층더 우아하고 세련돼 보이게 했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연주 옆에 내 아들이 없다는 사 실에 울 서러움이 복받쳤다. “"나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버님도 잘 계시죠?" 나는 연주 맞은편에 앉았다. 질은 색 마호가니 탁자 위에 푸른 장미 두 송이가 작은 크리스탈 화병에 꽂혀 있었다. 푸른 장미라니, 색깔도 비현실적인데다 바다가 연상이 돼서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야 늘 그렇지 뭐. 정우는 잘 있지? 미국서는 아직 휴대폰을 안 사 줬나 봐? 영상통화도 좀 하고 싶은데." "언니 교육방침이 아이에게 휴대폰은 최대한 늦게 쓰게 하는 거라서 저도 정해진 시간에만 언니 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어요." 나는 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연주가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어머니께서 여기 케익을 좋아하셨던 게 생각나서 시켰어요. 괜찮죠?' 한정식 식당에서 상견례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내려왔다가 케익 한 조각의 가격에 놀라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 연주가 아들 70 page 편에 j호텔의 케익 한 상자를 들려 보냈다. 호텔 베이커리의 케익은 비싼 값을 한나 싶을 만큼 맛있었다. 떠올리는 것조차 부질없게 느껴 지는 지난 일들이었다. “쇼핑몰이 아주 잘 된다면서? 나도 웃 몇 벌 시켰어. 친구들한테 사이 트 알려줬더니 인터넷으로는 쇼핑을 안 하든 애들도 너희 제품은 받아 보고 좋다고들 하더라." “어머, 그러셨어요? 저한테 따로 말씀하셨으면 제가 그냥 보내 드렸을 텐데요." “모델들 따로 안 쓰고 네가 입으니까 현실감이 있어서 좋더라. 왜 인 터넷 쇼핑몰들은 모델들 핏만 보고 사가 실제하고 달라서 못 입고 그러잖니." "어머니께서 그렇게 관심을 갖고 계실 줄 몰랐어요. 감사해요."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연주의 표정과 분위기가 전과 많이 달라져 있 었다. 물론 피팅 모델까지 겸하느라 얼굴이나 몸매에 신경을 써서 그 71 page 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에 잔잔히 번지고 있는 기뽑 이나 만족감 같은 것은 분명 이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예감이 늘었다. “이번 기일은 집에서 안 모이고 바로 추모원으로 갈까 싶어. 음식은 해 봐야 나중에 버리기나 하고,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모여 아들이 좋아 하는 음석을 하고 추모원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집에 오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추모원에라도 같이 가면 안 되겠니 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연주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 속 에 죽은 아들의 추억을 함께 공유하지 않겠다는 결기 같은 것이 엿보 여서 나노 모르게 비굴해지고 있었다. 연주가 내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깐 침묵하넌 연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머니, 이제 저는 그만 해야 할 것 같아요. 오빠가 떠난 지 5년이 됐 고, 어머니 생각에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는데, 저는.…재혼을 하게 됐어요. 그 동안 엄마가 계속 서두르시는 것을 최대한 피했거는요. 제 마음에서 그만 오빠를 놓을 수 있을 때까지 저도 시간이 필요했어요. 어머니 아버님께는 정말 죄송해요. 지난주에 저 혼자 오빠한테 가서 얘기를 하고 왔어요." 영주의 눈가가 빨개졌다. 나는 커피 잔을 모아 내 손이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자, 잘 했어.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그럴 수는 없지. 우리도 생각하지 72 page 않았던 건 아니야. 너도 나이가 있으니 언제든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쓸데없이 착하기만 한 아들 은 아마도 연주의 재혼을 축하해 주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나는 연주 에게 내 마지막 모습이 될 지도 모를 이 순간을 추하게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 것,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행복을 빌어줄 것. “제가 재혼을 하더라도 정우가 한국 들어오면 두 분을 찾아법도록 할 게요.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하니? 년 네 갈 길을 가야 하는 거고. 우리는 또 우리대로 사는 거지. 오히려 우리가 눈치 없이 널 오래 붙잡아 두고 있었던 것 같아. 우리 생각만 했어." “아니에요.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안 계셨으면 저는 마음을 다잡지 못 했을 거예요. 두 분이 든든하게 보살펴 주셔서 제 길도 찾을 수 있었 어요.” 연주의 얼굴에 숙제를 해결하고 난 후의 홀가분함 같은 것이 차올랐 다. 그것을 보자 내 안 깊은 곳에서 뒤틀린 심보가 됨겨 나오려고 했 다. 연주 앞에서 추한 끌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어금니를 악 물었다. -그런데, 연주야. 한 가지만 묻자. 너는 무슨 생각으로 이 얘기를 현수 랑 상견례를 한 이곳에서 하는 거니? 너 원래 이렇게 잔인한 아이였 니? 아니면 생각이 모자란 거니? 어떻게 여기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는 얘기를 할 수가 있어? 무슨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한 거니? 73 page 정우를 미리 미국으로 빼돌린 것도 다 네 계획에 있었던 거지? 네가 재혼하면 행여 우리가 정우를 데리고 가겠다고 할까 봐. 제 목숨 아까 운 줄 모른 내 아들놈만 불쌍하지. 아이고, 이제 겨우 마음 좀 잡고 사 나 했더니. 그래, 어디 좋은 놈 만나서 잘 살아라. 잘 살아 보라고. "아니다. 너랑 정우 녁분에 우리가 그래도 마음 추스르고 살 수 있었 어. 년 착하고 능력도 있으니까 잘 살 거야. 암, 이번에는 잘 살아야지." 마음속에서 들끝는 생각도 내 입에서 나온 말도 모두 진심이었다. 이렇게 다른 생각이 내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낮설었다. 허공에 붕 든 말들이 한동안 연주와 나 사이에 오고갔다. 나는 연주를 먼저 보내고 커피숍 의자에 깊이 기대앉아 시청 앞 잔디 광장을 내려 다보았다. 광장 너머 덕수궁 앞에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와 돌담과 기 울어져가는 햇살이 퍼지는 오후가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아들의 익사 소식은 남편의 전화로 걸려왔다. 아늘네 세 식구는 여름 휴가 첫날을 우리 집에서 보냈다. 아들 내외는 이른 아침에 짜증을 내 는 정우를 깨워 서두르며 집을 나섰다. 나는 지하주차장까지 잠이 널 정우를 안고 내려갔다. -엄마, 기다려요. 제 낚시 실력 아시죠? 엄마 좋아하는 횟감 잔득 갖고 을 테니까 기대하시라고요. -운전 조심해. 어떻게 네가 제일 들떠있냐? 연주도 정우도 시큰둥하 구만. -열마나 기다렸던 휴가인데요? 손맛 제대로 느낄 걸 생각하니까 손이 근질근질해요. 연주도 막상 가 보면 재미있어 할 거에요. 74 page -제발 정신 차리고 정우랑 연주 잘 챙겨. 단 몇 시간이라도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 날 아들을 보내지 않 았을 것이다. 아들은 회사 선배 아버지가 동해안 작은 포구에서 운영 하는 펜션에서 묵으며 낚시와 해수욕을 할 것이라고 했다. 아들은 낚 배를 힘들게 예약했다며 신나했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아들 의 차를 보면서 어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은 없었다. 늘 일에 치여 살 다가 모처럼 즐거워하는 아들을 보며 흡족했을 따름이었다. 그 날 이른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 고개를 개우뚱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식사를 마친 남편은 물 잔을 들고 식탁의자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남편이 물 잔을 떨어뜨리며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남편이 갑자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는 남편을 흔들었다. 남편이 가슴을 움켜쥐며 휴대폰을 나에게 넘 겨주었다.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미리 알아버린 느 낌이었다. -얼른 이리 오셔야겠습니다. 며느님께서 많이 힘들어 하시네요. 아드 님의 시신은 삼척에 있는 병원에 안치했습니다. 몇 가지 절차를 마친 다음에 가족께 인계할 것입니다. -지, 지금 우리 아, 아들이 주, 죽었다구요? 그, 그게 무슨 말이래요? -아, 방금 아버님께 말씀드렸는데 삼척에 있는 작은 해수욕장에서요, 아이들이 놀다 이안류에 휠쓸렸는데 아드님께서 아이들을 해안 쪽으 로 밀어 놓고 그만 빠져나오지 못해서.…이런 소식을 드리게 돼서 죄 75 page 송합니다. 어든 최대한 빨리 저의 서로 오시면.…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바낙에 주저앉았다. 귀속에서 삐-하는 소 리가 들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들이 손을 흔들며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연주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손이 떨려 몇 번이나 잘못 누르다 마침내 신호음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연주는 울기만 할 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연주야, 거짓말이지? 이거 누가 장난치는 거지? 응? 어서 대납을 해봐. 연주의 울음 사이로 배고프다고 보채는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딸에게 전화를 하고나서 거실과 방을 오가며 뭔가를 챙기고 있었다. -현수 방에서 증명사진 있나 찾아 봐요. -무, 무슨 소리야? 이거 다 거짓말이잖아. 왜 이런 거짓말에 속아서 이래요? -정신 차려. 지금 며늘애랑 정우가 거기 있어. 우리보다 몇 배나 더 힘들 애가 현수 옆에 있다고. 얼른 정신 차리고 그 애들을 보살펴야지. 남편이 충혈 된 눈으로 나를 다그쳤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들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죽은 아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 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정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음 이 뭔지도 모를 아이가 지금 정신이 나가있을 제 어미 결에서 배고프 다며 울고 있었다. 정신이 번찍 들었다.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딸이 둥둥 부은 얼굴로 남자친구와 함께 들어섰다. 딸의 남자친구는 삼척까지 운전을 해 주기로 했다. 옷만 겨우 갈아입고 우리는 출발했다. 77 page 그 후 3일 동안은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양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아들의 차가운 몸을 안다가 정신을 놓아버렸다 유령처럼 앉아 있다 손님을 맞이하고 보냈다. 누가 왔다갔는지 정확 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제 엄마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정우를 보며 정신을 차렸다가도 다시 멍해졌다. 식구들이 화장장으로 갔을 때 나는 가지 않았다. 아들이 불에 태워지 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내 몸과 한 몸이 되어 십 개월을 살았던 아이였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버린 상황을 나는 견딜 수가 없 었다. 식구들이 서울로 돋아가기 전 아들이 두 아이를 살려냈던 바닷 가에 들른다고 했을 때도 나는 호텔에 누워 있었다. 내 생전 바다는 절대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78 page 아들은 집에서 가까운 추모원에 두고 매일 찾아갔다. 여전히 불쑥 나타나 밥을 달라고 할 것만 같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체격이나 뒷 모습이 아들과 흡사한 사람을 보면 달려가 얼굴을 확인하기도 했다. 무엇을 해도 아들이 떠올랐고 아들이 없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오 년을 살았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죽을 것만 같던 마음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버타. 남 편은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거나 며칠 씩 집을 비울 때도 있었지만 어디를 가는지 묻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 대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간간히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이 편했다. 구청 문화센터에 등록을 해서 동양화 기초를 배웠고 세계미술사 수업 을 들었다. 뜨개질 수업과 브런치 요리 수업도 들었다. 수업을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잘 따라했다. 돌아서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과 싸워야만 했다. 올해 초 문득 아들이 죽으면서 살려낸 아이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방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찾아냈다. 사고 당시 살아난 아이들은 서울에서 놀러 온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형제라고 만 나와 있었다. 담당 경찰의 명함을 찾아 온 집안을 뒤졌다. 아들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버리거나 정리하지 않았다. 아들이 의사자(※ 쯤)로 지정돼 받은 서류철 속에 빛이 바랜 명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명함 속의 경찰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79 page 명함 속의 경찰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인터넷 포털을 검색해서 사람을 찾아주는 사이트를 찾아냈다. 사무실 로 직접 찾아가 아이들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다. 탐정 허가를 받은 전 문 업체라며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지만 연락은 바로 오지 않았다. 일 주일 쯤 지났을 무렵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큰 아이는 소년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죄질이 어지간히 나쁘지 않 으면 소년원은 잘 보내지 않는데. 아이들 아버지는 강도상해 협의로 교도소에 있고, 아이들 엄마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모양이더라고요, 아이들 엄마는 찾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보육원에 있더라고요. 아이들을 만나 보시겠어요? 나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업체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 온종일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설거지 하다가 접시 몇 개를 깨뜨렸다. 그런 아이 들을 살리려고 죽은 아들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정말 기가 막혀서. 어떻게 그런 아이들을 살리겠다고 그렇게 허망하 게 목숨을 버려요? 남의 목숨을 대가로 살아난 아이들을 잘 키우지는 못할망정 교도소에 가 있지를 않나,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지를 않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정말. -뭘 바랐던 거요? 그 아이들이 인생을 다 산 것도 아니고. 설사 훌륭한 아이들이 못 된다고 해서 현수가 했던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닌데 괜한 데 마음 뜨고 돈까지 쓰고. 앞으로는 그런 일에 힘 빼지 맘시다. 남편은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도 퍼보 싶었다. 당신은 뭐 가 그리 잘나서 그렇게 담담할 수 있냐고, 아들이 구한 아이들이 잘 크기를 바라는 것조차 해서는 안 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 80 page 만 남편은 또 집을 나갔다. 나는 호텔 커피숍에서 나와 어두워지기 시작한 거리를 걸었다. 명동 쪽으로 넘어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인지 문 닫은 곳이 많았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던 거리가 한산했다. 명동의 상징 같았넌 먹 거리 가판대들이 없어서인지 더 해보였다. 나는 목적지나 방향을 정하지 않고 걸었다. 아들이 죽고 가장 많이 한 일이 바로 무작정 걷 기였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걷고 나야 그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충무로 쪽으로 넘어가자 남편과 연애할 때 자주 갔던 대한극장이 보 였다. 지금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극장 옆 좁은 골 목의 해장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봤넌 때가 떠올랐다. 35년 후 에 아들이 죽을 것을 알았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을까. 나는 극장 건물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들이 우리 에게 오기 전 둘이서 함께 했는 날들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은 너무 멀 어진 남편과의 거리감이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 었다. 연주마저 우리와 인연을 다 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한 묶 했을 것이다. 남편은 전화들 받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은 작년 아들의 기일에 도 집에 없었다. 혼자서 아들의 기일 준비를 하게 만드는 남편에게 화 가 났지만 차라리 얼굴을 안 보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작년에 는 그래도 연주가 옆에 있어서 위안이 됐지만 올해는 나 혼자서 준비 할 자신이 없었다. 81 page 딸은 제 오빠가 죽기 전 결혼식 날짜를 받아둔 상태였다. 사돈택의 배려로 양가의 가까운 친척만 모여서 저녁을 먹은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 했다. 딸은 2년 전에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났다. 딸은 한국 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 을 생각인 것도 같았다. 차라리 그런 딸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몇 번인가 산티아고 순례 길을 나서볼까 생각만 하다가 실행에 는 옮기지 못했다. 발이 부르틀 때까지 걷고 또 결으며 왜 나에게서 아들이 떠나가야만 했는지, 아들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처럼 하루하루 버티고 견디는 삶은 무의미했다. 끝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됐 을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두려웠다. 남편에게 오늘 연주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슬픔을 나누 고 싶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애도과정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과 나는 점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편과의 거리를 좁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 었다. 나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이 없는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남편이 있었던 흔적이 없었다. 남편은 물 한 잔을 마셔 도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쓰는 작은 방을 열어 보았다. 82 page 침대 발치에 개켜진 이불이 이틀 째 그대로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딸이었다. -엄마, 잘 지내지? 더위 때문에 많이 힘들지? “더운 지도 잘 모르고 지냈어. 넌 어떠냐? 별 일 없지? -몸이 힘들어서 병원 갔더니 임신이래.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현아야, 잘 됐다. 정말 잘 했어. 축하해. 입덧 같은 건 없어? 나는 아들이 먼저 떠올랐다. 제 동생을 많이 아끼고 예뻐했던 아들 이라 동생의 임신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을 것이다. -아직은 피곤한 거 말고는 괜찮아. 아빠는? 집에 안 계시지? “요맘때 자꾸 며칠씩 사라져 버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었어. 아빠가 너한테는 연락하시니? -가끔 내가 하지. 엄마, 아빠를 너무 외롭게 하지 말아요. 엄마도 힘든 거 아는데 아빠도 좀 챙겨주세요. 얼마 전에 아빠랑 통화했는데 많이 불안정하시더라고. “애가 뭘 모르네. 네 아빠는 나보다 더 잘 지낸다야. 다들 나만 갖고 뭐라고 하지. 네 아빠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데." -정말 강한 거랑 강한 척 하는 거랑은 다르잖아. 내가 보기에 아빠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야. 엄마나 새언니랑 정우 때문에 참고 견디 고 강한 척 하신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 서운해지려고 한다. 암튼 알았어. 근더 혹시 연주가 너한테 연락했었니?” -네.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상대도 사별한 사람이라나 봐 요. 아빠도 알고 계실 거예요. 아빠한테 제일 먼저 연락한 것 같던데. 83 page “그게 정말이야? 진짜 연주가 아빠를 만났대?" -새언니랑 아빠랑 서로 잘 맞았잖아요. 오빠 떠나고 둘이서 자주 만났 던 거 같던더. 나는 엄마도 알고 있는 줄 알았지. 현아와 어떻게 통화를 마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서로 긴밀하게 지냈다는 것이 이처럼 속상할 일인가 싶었지만 서운한 것은 얼 수 없었다. 이런 내 옹졸한 심사가 나 자신 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은 연주에게 재혼 얘기를 듣고 어디론가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쾌싼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프 면 아프다고 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소리치거나 울면 되지 어쩌자고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을 드 러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혼자서 아들의 기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어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지. 남편에게 내내 그런 마음이 들 었다. 장을 보러 가려고 자동차 키를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하주차장을 다 뒤져도 우리 자동차는 없었다. 남편은 혼자서는 언 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차를 몰고 갈만한 곳이 어디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하 주차장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편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은 연주밖에 없었다. 연주에게 선뜻 전화를 할 마 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올라왔다. 장을 볼 생각은 아예 없어졌다. 나는 남편이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는 깔끔하게 정돈 돼 있었다. 정돈된 84 page 책상이 낮설었다. 요즘 읽는 책들은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제목에 상실이나 애도, 죽음 같은 날말이 들어간 책들이 많았다. 서랍 을 열어 보았다. 여러 종류의 만년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남편 은 뭔가 하나에 깊이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빠진 것이 있 다면 만년필이었다. 비싸지는 않지만 필기감이 좋은 만년필을 좋아해 브랜드 별로 모아놓곤 했다. -글 쓰는 사람도 아니면서 무슨 만년필을 그렇게 모은대요?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남편이 얼굴을 붉혔다. 남편은 청년 시절에는 작가가 꿈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라 포기했다고 말했다. 결혼 전에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남편이 아끼던 만년필 한 85 page 자루를 꺼냈다. 메모지에 글씨를 써 보려고 했지만 잉크가 말라서 써 지지 않았다. 다를 만년필들도 모두 잉크가 말라 있었다. 최근에 남편 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불안함이 몰려왔다. 자존심과 서운함을 내려놓고 연주에게 전 화를 했다. -네, 어머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혹시 아버지 어디 가셨을지 짐작 가는데 없니? 그 동안 아버지 자주 만났다면서.' -아버님은 작년에 오빠가 사고를 당한 바닷가에 가 계셨어요. 어머니 께는 말씀 드리지 말라고 하셔서. 올해도 거기 가 계신 거 아닐까요? "알았다." 내 목소리가 쌀쌀맞은 것에 놀라면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대충 쏘 간난하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서 세운 택시 운전기사에게 삼척가지 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택시기사 에게 돌아올 요금까지 지불하기로 하고 택시에 올라봤다. 좌석등받이 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지난 5년의 세월을 떠올려 보면 내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울다 가 호흡 곤란이 와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거나, 며칠씩 음식을 먹지 못해 탈진상태가 돼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 때마다 남편은 내 옆에 있었다. 나에게는 남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도 잘 버티고 있다고 믿었다. 내 아픔만 들여다보며 보냈 던 시간 동안 남편은 어디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일까.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 하늘을 뒤로하고 택시는 달리고 있었다. 소도 86 page 시의 중심가를 벗어나자 멀리 수평선이 먼저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 려앉았다. 바다를 볼 자신이 없었다. 작은 포구를 끼고 돌아들자 해안 가가 나타났다. 파도는 흰 포말을 토해내며 끝없이 둥근 해안가로 밀 려오고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해안가를 누른 소나무 숲을 지나 모래사장 안으 로 들어셨다. 바다를 향해 어깨를 맞대고 앉은 연인들이 보였다. 듯자 리를 깔고 앉은 가족들도 보였다. 해안가 끝에 긴 방파제가 있고 그 끝에 작고 빨간 등대가 서 있었다.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나는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사람들 속에서 남편이 아넌 아들의 얼굴을 찾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 라 등대가 바라보이는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방파제가 가까운 해변에서 형광 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줍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허 리를 숙여 쓰레기를 줍고 큰 봉투에 담다가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먼 수평선 쪽을 바라보곤 했다. 남자가 뒤돌아서다가 내 쪽을 바라보았 다. 남편이었다. 남편도 나도 놀라지 않고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여기 진짜 아름답죠? 여기에서 저는 행복했어요. 엄마도 이제는 행복하기를 바래요. 파도 소리에 아들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도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기를 바랐다. 남편이 방파제 앞 모래 언덕에 등을 보이 고 앉았다. 남편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위안이 된 적이 없 었다. 87 page 어둠은 바다 쪽으로 더 빨리 내려앉았다. 빨간 등대에 붉은 빛이 들어와 깜빡거렸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깜박이는 등대불빛을 바라보았다. 먼 곳을 비추는 등대는 아니었지만 작은 등대는 자신 만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작은 등대의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쏘아올린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88 page 누수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소설(단편) 백종희 습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비린 바다 냄새 같기도 하다. 남자는 공간 마다 하나씩 구멍을 놓고 갔다. 그중 가장 작은, 거실 온도장치 아래 만들어 놓은 구멍 앞에 섰다. 구멍 속으로 뒤엉킨 시멘트와 난방 배관 이 보였다. 그것들 사이로 흐릿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흙과 돌 부스러기가 흘어지며 하얀 형체가 점점 드러났다. 그것은 사람의 열굴이었다. 얼굴은 주변 흙먼지를 입으로 불며 쑥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구멍 속 얼굴은 느리게 눈을 뜨며 물었다. 어떻 살아 점수까? 펜안 해수과? 얼굴은 동생을 닮아있었다. 그 애를 못 본지 한 해가 지나고 있었다. 얼굴은 힘없이 웃었다. 무언 89 page 가 더 말하려는 듯 몇 차례 입을 꺼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눈과 입가 주름 사이로 뿌연 먼지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다시 배관 사이로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 공기가 축축해져 왔다. 나는 거실 중앙에 놓인 가방을 바라봤다. 그것은 알루미늄 테두리로 감싸여진 검정 합판의 다부진 가방이었 다. 겉면이 단단한 내부 보호용 가방으로 크기는 기내용 여행가방과 같았다. 입구를 잠근 버클을 열면 카메라나 그 집기 같은 것이 튀어나 을 것만 같았다. 남자가 떠난 문을 슬찍 올려다보고는 다시 가방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단단하게 맞물린 잠금쇠를 거침없이 열어젖혔 다. 안에는 남자가 카메라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기계장치가 있었다. 그는 기계를 누수감청장치라 했다. 물이 어디서 세는지 감지하는 기 계였다. 각 티슈 크기의 장치는 무게가 상당해 보였다. 기계 전면은 초침이 그려진 계기판이 있고 계기침은 부채꼴 모양으로 왔다가 갔다 흔들렸다. 흔들리는 계기첨 아래로 워터 릭 \86(6@ L68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다이얼 버튼과 스위치 버튼은 각각 세 개씩 아래위로 자 리 잡고 있다. 그리고 기계에 꽂힌 헤드폰. 맞아 그는 이걸 쓰고 이곳 저곳을 살펼었지. 남자는 플라스턱으로 만들어진 조악한 헤드폰을 머 리에 쓰고 방안을 돌아다녀. 벗지 않은 그의 신에서는 회백색 모래 가 지문처럼 따라다다.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그는 짓가락처럼 가느다란 봉을 쥐고 구멍 난 바닥을 찔렀다. 주방 싱크대는 늘린 채 바낙에 커다란 구멍을 내보였다. 거실 90 page 강화마루는 뜰겨 주변을 나됨굴었고, 작은 구멍 하나가 멀정한 온수 배관을 내보이고 있었다. 화장실은 삐뚜름히 치워놓은 변기통과 전동 드릴에 부셔 날리는 백색시멘트로 엉망이었다. 끈질기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눈을 따.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트랭동 트랭동 울리는 소리를 따라 골이 흔들렸다. 시트에서는 내 것이 아닌 익숙하 고 그리운 누군가의 체취가 느껴졌다. 잠는 아기의 따 같기도 하고, 어미젖을 빠는 소동물의 냄새 같기도 했다. 저 벨 소리만 아니라면 냄 새에 묻혀 다시 잠에 빠지고만 싶다. 잠든 곳은 동생의 방이었다. 방 은 그 애가 떠나기 전까지 사용했고, 그 뒤 내가 쓰다가 다시 동생의 물건들이 쓰는, 집에서 가장 큰 공간이었다. 지금은 동생의 침대며 몇 안 되는 옷가지 등 주인 잃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이사 전까지 버리든 팔는 해야만 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지난밤 혼자 술을 마시고 저도 모르게 이 방에서 잡이 들었던 모양 이다. 91 page 남향의 방은 종일 빛이 쏟아지곤 했다. 방의 커튼과 이블은 직사광선 으로 부분의 색이 바랬다. 동생의 사진관을 정리하며 가져온 커다란 배경 천을 암막으로 사용했다. 암막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 게 했다.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골의 흔들림을 잠재웠다. 밖에 서 올려대는 벨소리는 잠시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금 올려 왔다. 트랭동 트랭동 소리는 미지 부족의 언어를 닮아있었다. 내가 나올 때 까지 한발자국 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암막을 걷히자 거칠게 태양 별이 쏟아졌다. 아직 낮이구나 싶은 마음은 아쉬움인지 뭔지 모르겠 다. 검은 천을 원래 자리로 밀어 닫고 침실을 나와 인터폰을 확인했 다. 좁쌀처렴 작은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여인의 얼굴이 화면에 들어 92 page 왔다. 입술에 칠해진 자홍색 루즈와 푸른빛의 아이라인 문신. 아래층 에 사는 주인집 여자였다. 그녀는 인터폰 너머로 나를 한심한 듯 바라봤다. 트랭동 트랭동 바지를 찾아 입고는 머리를 싸매며 화장실로 갔다. 거울 속 과음으로 피로한 얼굴을 살평다. 부은 두 눈 주위에는 눈곱이 진득하게 붙어있 고, 입 주변으로 침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말라있었다. 마른세수를 하 고 구강 청결제를 꺼내 입 안 가득 머금다 밸었다. 뒤늦게야 소리를 여자가 들었을까 싶어 숨을 죽였다.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주인은 나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몇 분을 눌러도 대꾸가 없어 무슨 일이 있는 줄만 알았다고 한다. 나는 몸이 안 좋아 늦잠을 좀 다고, 토요일 오전부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하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딱히 나를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잠시 후에 누수탐지를 하러 사람이 을 거라 말했다. 여긴 아무 이상 없는데요. 총각 네가 아니라 아니 우리 집 천장에 물이 떨어지니 그렇지. 얼마나 많이 새는지 주방 쪽이 아주 한강이야 한강. 그쪽서 새는 게 분명 하 니까는 이따 한번 살펴봐야 쓰겼어. 병원을 가야 해 집을 비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녀는 듣는 등 마는 둥 했다. 누수 아저씨랑 약속 잡기도 힘들뿐더러 오늘 아니면 내가 집 에 언제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동생과는 연락도 힘드니 오늘 본 김에 누수탐지를 하자는 것이었다. 설 새 없이 떠드는 소리에 현기증이 일 93 page 었다. 그리고 어제 먹고 마신 정종이며 기름전들이 속안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오는 듯했다. 그녀는 내게 암호처럼 '트랭동 트랭동' 하고 말 했다. 나는 여자에게 '랑드통 랑드통' 하고 답했다. 동생은 내게 '마크 톱 마크톱' 하며 웃었다. 그것은 동생이 어린 시절 읽던 책 속, 요정의 언어였다. 동생은 뜻도 모를 말을 하루 종일 따라했다. '마하켄다 프펠 도문, 마크톱 마크톱' 이라거나 '마하켄다 라바에몸, 디비디 바비디 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말들. 우리는 그 안에서 대화를 하기도 했고 우리 만의 인사를 만들기도 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말들은 다 제각각이 어서 금세 잊혀 졌지만 우리가 만든 인사말은 신기하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트랭동 트랭동 팽한 목소리에 잠잠했던 골이 다시금 울렸다. 여자에게 오늘은 아무 래도 힘들고 다음 주 초에 다시 날을 잡자 말하고 문을 당겼다. 닫혀 지는 문 틈 사이로 여자의 자그마한 슬리퍼가 불쑥 들어왔다. 어찔 수 없지 그럼.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 갈탱께, 총각은 병원 다녀 와. 주인도 없는 집에 어떻게 아무나 들여요, 고양이도 있고 카메라며 귀중품은 다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여자 는 아무도 홈쳐갈 사람 없으니 병원을 가든 집에 있던 마음대로 하라 며 웃었다. 현관문을 닫고는 소파로 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소파 아래로 잠에 서 고양이가 올라와 발에 머리를 부벼. 밥 달라는 신호였다. 일어 나 주방 서랍에서 통조림 캔 하나를 꺼내 그릇에 부는 포크로 잘게 94 page 다졌다. 그릇을 발치에 두고 몸을 일으키니 다시 한 번 세상이 빙글 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술병과 음식물 냄새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서랍을 열어 타이레놀 한 알을 꺼내려다 두 개를 꺼내고 물과 함께 약을 넘겼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벽에 기대어 섰다. 냉기 가득한 벽면 으로 벽지가 울었다. 벽지는 아래층 여자의 짜증 난 얼굴을 하기도 했 고 아무도 아닌 누군가의 얼굴을 하기도 했다. 그 얼굴은 어린 시절 집 천장에서 보았던 얼룩을 닮아 있었다, 홀로 일하는 어머니는 퇴근이 늦었다. 엄마가 집에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항상 먼저 잠이 들었다. 내가 9살, 동생이 5살. 동생은 천장의 얼굴을 무서워했다. 가끔 그것이 눈을 좌우로 움직이며 천장 이쪽 끝 에서 저쪽 끝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나는 허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라며 동생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동생은 울다가 잠이 들었고, 잠든 동생 의 몸에서는 열은 소금냄새가 났다. 사실 무서웠다. 정말 우리가 잠이 들면 얼룩이 우리 몰래 방안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동생은 무서운 것이 많았다. 안방 문틀의 나무옹이를 귀신의 얼굴이 라 하기도 했고, 화장실 변기의 물 내려가는 소리를 이웃집 여자의 비 명이라고 하기도 했다. 동생은 밤에 화장실을 갈 때면 항상 나를 깨웠 고 그런 동생이 똥이나 오줌을 다 눌 때 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동생은 내가 저를 두고 가 버렸을까봐 몇 번이나 나를 찾았다. 나는 화장실 앞에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노래를 불렸다. 만화 주제가를 부 르기도 했고, 가요를 부르기도 했다. 노래는 사람의 옆모습을 한 거실 벽지도 들었고 장판 속 귀신얼굴도 들었다. 95 page 눈을 좌우로 살피는 천장 얼룩도, 머리를 부스스 풀고 있는 꽃무늬 커튼도 모두 내 노래를 들었다. 집주인이 가고 한참이 지났지만 누수기사는 오지 않았다. 나됨구는 술병을 봉투에 넣고 술과 기름으로 얼룩진 테이블을 낚았다. 그것은 물티슈로도 잘 닭이지 않았다. 나무 테이블 사이로 다 스민 것이다. 테이블에서 달달한 정종 냄새가 났다. 어제 먹다 만 동태전과 나물 반찬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어머니는 필요 없다는 말에도 한사코 그 것을 싸서 내 손에 쥐여 줬다. 버리더라도 가져가서 버리라는 말도 함 께했다. 그것을 채로 음식물 봉투에 쑤셔 넣었다. 생각처럼 잘 들어가 지 않았다. 그때 잠금장치가 돌아가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 로 들어왔다. 고양이는 기척을 미리도 느끈지 어딘가에 숨어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주방 안쪽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익숙한 듯 집안을 살 평다. 투실한 몸과는 다르게 행동이 민첩하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남자는 다 해진 작업 바지를 입고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가죽 워커를 신었다. 그 신발에는 어디에서 묻어왔는지 모를 하양게 말라버린 모래 가 잔뜨 묻어있다. 남자는 어깨에 멘 작업가방을 바닥에 무심히 내려 났다. 바닥이 콩 소리를 내며 무겁게 울렸다. 가방에 무엇이 들어 저런 소리가 날까. 누수 기계가 들어있을까. 아니 칼이나 망치가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누수를 탐지하러 온 기사일 수도 있지만 강도나 도 둑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3층 계단을 오르느라 힘이 들었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어떻게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온 것일까. 주인 여자가 마스터키를 내준 것일까. 세입자라지만 허락도 없이 이렇게나 막무가 96 page 내로. 그녀는 이런 식으로 몇 차례나 다른 이에게 집을 내주었을까. 부아가 치밀어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단주거침입으로 신고를 해야 하나. 그렇다면 경찰을 불러야 할까 변호사를 찾아야 할까. 남자가 손 전등을 꺼냈다. 침입자의 얼굴이 조명에 어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양 손에 주먹이 곽 쥐어 졌다. 그의 앞에 섰다. 나를 발견한 남자가 깜짝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의 놀란 얼굴 위로 나의 검은 그림자가 겹 쳐보였다. 그가 내 쪽으로 손전등을 비줬다. 나는 그가 누수기사이기 를 바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상 없으니, 나가세요. 남자는 당황한 얼굴을 하면서도 손전등을 내려놓지 않았다. 쏟아지 는 조명에 얼굴을 찜그렸지만 그는 조명을 끄지 않았다. 동그란 빛이 얼굴 가득 쏟아졌다. 그것은 따뜻하고 익숙한 빛이었다. 나는 부신 눈 을 참으며 조명 너머를 바라봤다. 동생은 조명을 깜이며 내게 웃으 라 말했다. 그리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력서에 쓸 증명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사진을 핑계로 동생네 사진 관이 있는 이곳을 찾았다. 사진관은 규모가 작아 전체를 돌아보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동생은 믹스커피 한잔을 내어주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사진관 중앙에는 오래된 화목난로가 부들부들 떨며 열을 내고 있었다. 동생은 웨딩사진을 보정하는 중인 듯 싶었다. 내가 고개 를 쪽 빼고 보자 농생은 이것만 마치고 찍어줄게 하며 소리 없이 웃었 다. 작업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담배나 태우고 오겠다 말 하고 밖으로 나갔다. 3층 옥탑에 위치한 사진관은 많은 것이 생략돼 97 page 사진관 98 page 있었다. 간판도 생략된 채 검정 스프레이로 '사진관'이라는 글자만 투 박하게 칠해져 있다. 페인트칠도 혼자 한 것인지 벽의 어느 면은 두 고 어느 면은 너무 않게 발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진관은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옥상에 세워둔 패들보트가 그랬고, 최근에 쓴 듯한 젖은 흙 삽과 날이 하나 남은 선풍기. 작동이 되는지 궁금한 신시사이 저 같은 것. 공간은 사진을 찍는 용도보다 무언가를 적재해 누는 곳으 로 보였다. 옥탑 너머로 붉은 등대가 보였다. 더 뒤로 회색 바다가 희 부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곽이 빈 것 을 확인하고는 손으로 우겼다. 난간에는 아직 녹지 못한 눈이 쌓여 있 었다. 이곳은 몇 일째 폭설로 교통이 마비되었다가 내가 오기 며칠 전 에야 풀렸다. 옆에서 돌아가는 무동력 흡출기는 '기기직 기기기 소리 를 냈다. 불지도 않는 바람에 돌아가는 흡출기였다. 어린 시절 동생은 멀리 아파트 옥상 흡출기를 보며 저기 좀 봐. 저기. 사람이 있어. 사람. 하고 말했다.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사람. 나는 그것이 왜 모르게 소름 끼쳐 괜히 동생에게 화를 냈다. 야. 쳐다보지 마. 쳐다보지 말라고, 사람이 아니라고. 추위에 곱은 손을 부비고는 실내로 걸음을 옮겼다. 작입을 마쳤는지 동생은 카메라를 매만지고 있었다. 동생이 내게 둥근 회전의자를 건 네며 검은 천 앞에 앉으라 했다. 의자에 앉자, 동생이 내게로 와 앞머 리를 정돈해 줬고 손으로 턱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동생의 손끝은 틸는지 가슬가슬했다. 그리고 세워둔 카메라로 가 조 99 page 명의 셔터를 눌렸다. 얼굴 가득 빛이 쏟아졌다. 나는 얼굴을 찌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동생은 피하지 말고 렌즈를 바라보라 말했다. 동 생이 카메라의 구명 너머로 나를 지켜봤다. 나는 손을 내리고 크게 심 호흡을 하고는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철커 소리와 함께 카메라 가 돌아갔다. 그 애는 내게 뭉근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좋았던 순간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입가에 작은 미소가 머금어졌을 때 동 생은 또 한 번 철럭 소리를 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남자는 지난번에 와서 확인했으니 오늘은 바로 감청부터 하겠다고 했다. 지난번은 언제를 말하는 거고 감청은 또 뭘까. 남자는 생뚱한 표정을 지으며 이미 지난번에 다 마쳤다고, 바로 누수 감청을 하겠다 는 말만 반복 했다. 그는 가방에서 기계장치를 꺼내 긴 끈을 목에 걸 었다. 그리고 뚝 소리를 내며 탐침봉을 포트에 꽂았다. 잘못 꽂았는지 옆에 난 작은 구명에 다시 탐침봉을 꽂았다. 그가 목장갑은 오랜 사용으로 인함인지 손끝으로 갈수록 색이 검었다. 남자의 손이 미세 하게 떨렸다. 그에게 주인집에 이야기 할 테니 다음에 오라 말했다, 남자는 먼지 가득한 워커를 바낙에 퉁퉁 털며 나를 봤다. 그는 짜증이 난 것인지 양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이 아니면 한 달 뒤에나 예약을 잡 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아래층에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끝내버리자는 말도 했다. 누수로 젖은 집이 그렇게나 많단 말인가. 완 공 된지 5년이 안된 집이었다. 누수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라 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누수탐지기의 전원버튼을 누르고 심드렁 100 page 하게 말했다. 겉은 말짱해도 파보기 전에는 그 속이 어떤지 아무도 모르지 뭐. 신 축이건 노축이건 샐 곳은 다 새는 거지 뭐. 버릇인지 그의 모든 말에는 '뭐 가 붙었다. 남자는 더운지 모자를 훌 렁 벗었다. 그의 정수리는 웰하게 비어있었다. 주머니에서 면 수건을 꺼내 정수리의 딸 낚았다. 어떻게 예약이 한 날씩이나 차있냐고 물 었다. 그는 타고난 청력과 감이 중요하다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 니라 말했다.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올라왔냐 고 물었다. 그는 탐침봉을 공종에 휘휘 저으며 '다 요식행위지, 뭐' 했다. 동생네 사진관은 인기가 많았다. 사실 그것은 순전히 그 애의 이야기 였다. 동생은 916로 나름 홍보가 잘돼 촬영예약이 올봄 까지 차 있다 고 했다. 지금 그 많은 예약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동생은 모니 터를 바라보며 내 증명사진을 보정하고 있었다. 이마를 가리는 잔머리 를 보정 툴로 정리하고 짝짝이 눈썸의 크기를 맞줬다. 나는 동생에게 인기가 많아 좋겠네 하고 말했다. 동생은 보정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 은 채 유쾌하게 말했다. 슴두렁 편편호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지만 동생은 웃기만 할뿐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이 정도 평수의 집이면 물새는 곳은 하다고 했다. 그는 물이 새는 소리들 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보일러를 살펼고 주방 101 page 으로 가 정수기와 배수관을 살다. 마지막이 화장실이었다. 남자는 누수탐지기를 메고 뜰 흘렸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그에 게 건다. 남자는 물을 마시며 침실 문을 한번 흘깃 했다. 저 방을 한 번 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이미 볼 곳은 다 봤고 유일하게 못 본 곳이 침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저 방은 보일러 밸브도 잠가 놓은 상태이고, 짐이 많아 보기 힘들거라 말했다. 남자는 물을 한 번 더 삼키고는 못내 찜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도 한번 보긴 해야 하는데 하고 말했다. 신축에도 누수가 자주 일어나는지 물었다. 그는 누수는 가리는 곳이 없다며,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한번 일을 치를 때 말끔히 끝리자고 했다. 탐지기에도 안 잡히는 누수라면 짐작 가는 데 로 놓고 보는 것뿐이라는 말도. 그렇게 보이는 데로 구멍을 놓다가 못 찾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별 질문을 다 한다는 표정을 지 었다. 찾아야지. 끝까지 찾는 것 말고 방법이 더 있나, 뭐. 사진관에는 삼단짜리 오래된 책장이 있었다. 첫 번째 칸에는 사진 기 술과 이론서 그리고 이름 모를 작가의 사진집이 빼뻐했다. 중간과 하 단에는 좀 엉뚱한 책들이 많았다. 동생의 취미나 취향을 종잡기 힘들 다고 해야 할까. 오카리나 독법, 우쿨렐레 악보집, 1인 건축의 기술, 누수 탐지와 보수, 당근 파종과 수확. 그 책들 가운데 손바낙 크기의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 곳의 방언을 설명하는 일종의 사전 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 눈으로 살펼다. 말은 읽어 봄 직하게 명랑했고 생기가 넘쳤다. 생략되거나 축약되거나 했고, 동그랑게 동동 102 page 떠 있다가 탁하고 내려앉는 느낌의 말들이었다. 그 낮선 말은 어린 시 절 우리가 나누년 요정의 말을 닮아있었다. 그때 우리가 나누던 인사 말은 뭐였을까. 그 말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기억하려 집중하면 할 수록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걸 다 외웠냐고 묻자 동생은 심심 할 때 한 번씩 보다 입에 붙었다고 했다. 이렇게 지역 말을 한두 마디 붙여 건네면 동네 식당 서비스가 달라져. 접촉사고가 나도 더러는 그냥 넘어가지. 동생은 자기도 이제 여기 사람이니 지역의 언어를 쓰겠다 말하며 웃 었다. 그리고는 디지털 인화가 끝내어진 사진을 절단기에 올려뒷다. 절단기는 우그석적 소리를 내며 사면 테두리를 잘랐다. 나는 책을 한 차례 후루룩 옮어 넘기고 책장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오카리나는 뭐 며 건축이랑 누수는 뭐냐고 물었다. 저 옆에 쌓여있는 배관 파이프는 뭐고 흙 삽은 뭐냐고, 줄이 두 개 남은 고물 기타는 뭐냐고 묻고 싶었 다. 마른 침을 삼켰다. 이곳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동생은 다 잘려진 사진을 작은 봉투에 넣어 내게 건다. 내가 그결 받아들자 동생은 귀를 한번 후비고는 기지개를 켰다. 동생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그대로 서서 잠들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 아무것 도 되지 않으려 이것저것 하는 거야. 보도블록 사이에 핀 이름 모를 들꽃. 줄이 풀려 기우뚱하게 걸린 현 수막. 비행운만 남은 병 빈 청록의 하늘. 정자 아래 흐트러진 아이들의 103 page 오색 운동화. 먼지가 내려앉은 유실물 보관함. 동생의 방은 그런 사진들로 가득했다. 동생은 대학 입학 후 한 학기를 마치고 입대를 했다. 자대 배치를 받 고 첫 휴가를 나온 이후로 동생은 집을 찾지 않았다. 엄마의 연락을 받고 동생의 면회를 대신 갔넌 날이었다. 포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만남은 면회소가 아닌 포대장 실에서 이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은 기묘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그 애에게만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듯 보였다. 나를 보는 동생의 눈이 비어 있다.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 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애 옆에 서있는 젊은 군인은 자신이 동생의 선임이라고 했다. 그는 동생이 밤마나 이상한 말을 한다고 했다. 그래 서 모두 힘들어 한다고도. 어떤 이상한 말을 하냐고 물었다. 선임은 듣기는 들어도 따라 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매일 천장을 바라보며 중 얼 일 때도 있고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찾으면 화장실 문을 꼭 잡은 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동생이 선임 쪽으로 고개를 삐뚜름히 돌렸다. 우리를 지켜보던 포대장이 입을 열었다. 전에도 동생이 이런 적 있습니까. 내가 말이 없자 포대장은 동생이 몇 차례 위혐한 시도를 했다고 말했 다. 동생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제 맞은편 벽에 걸린 태극기만 바라 봤다. 의병제대를 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날리, 동생은 제 의지만으로 104 page 복무기간을 모두 채우고 전역을 했다. 동생은 복학을 하지 않고 줄곧 사진만 찍었다.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찍기도 했고,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찍기도 했다. 가끔 찾는 동생의 방에는 각기 다른 사진들이 가득 했다. 하지만 본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한 장이 없었다. 사진기사로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 지방 공기업에 들어갔다. 일을 곧잘 했는지 계 약이 연장돼 3년을 더 다다. 동생 방에 사진들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악수를 하는 작업물이나 행사 현수막 사진이 모니터 위에 많이 걸렸다. 그 무렵 나는 대학 기숙사를 나와 동생의 자취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다가 집에서는 잠 만 자고 나가고는 했다. 일을 일찍 마치고 집에 올 때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 꺼진 거실 소파위로 누군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티브이를 무표정하게 보 고 있는 동생이었다. 티브이는 없는 채널에 맞춰져 회색 노이즈만 요 란히 송출됐다. 파리 떼 같은 화면과 치르직 소리에 정신이 없다. 가방 을 콩하고 내려놓자 동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티브이 화면에 일렁이는 동생의 표정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힘들다. 외 투를 벗으며 동생에게 무엇을 보냐고 물었다. 동생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 쪽을 돌아보는 동생의 시선이 내 얼굴 너머로 비껴나 있다. 목덜미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흑 올라왔다. 그때 나는 왜 그렇 게 화를 냈을까.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끄고는 바닥에 내리 꽂았다. 리모컨이 나동그라지며 건전지가 바닥에서 굴렸다. 동생은 제 발아 래로 나됨구는 건전지를 쥐어 들었다. 그 애의 멸을 잡아끌고 꺼진 105 page 티브이 화면 가까이 섰다. 뭐가 있는데. 여기 뭐가 있냐고. 동생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숨기 힘들다고 했던가, 아니 숨쉬기 힘들다고 했었나. 그애는 무어라 말했던가. 손에서 건전지가 특하고 떨어졌다. 동생은 얼마 뒤 사표를 내고 떠났다. 그것은 왜인지 놀랍지가 않았 다. 언제고 그 애가 여기건 어디에서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 지도 모른다. 성실한 아이니 어닐 가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 나보다 더 크게 걱정하는, 이제는 다른 가정을 꾸린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말로 동생을 대신해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누구를 의지해 무엇을 먹고살지 걱정이 드는 것이 사실 이었다. 누수기사는 찾아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주방 싱크대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힘에 부치는지 나를 불러 함께 들자고 했다. 그와 힘을 실어 싱크대를 들어서는 옆으로 빠. 그는 냉온수 배관에서 물이 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잘 들어보면 '쉬 이 하는 소리와 함께 물 냄새가 날것이라며 코를 켰다. 그를 따라 코를 크리며 살지만 물 냄새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내 코에는 기름전과 정종의 달큰한 냄새만 느껴졌다. 남자는 가방에서 쇠꼬챙이 와 망치를 꺼냈다. 강화 마루의 홈에 쇠꼬챙이를 끼우고 망치로 내려 106 page 치니 너무 쉽게 장판이 들렸다. 그것을 뜰어내고 전동 드릴로 거침없 이 시멘트를 파쇄 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돌조각과 파편이 이곳 저곳으로 튀었다. 부위를 망치로 한참을 두드리고 나니 바닥에는 노란 색과 파란색의 수관이 드러났다. 남자는 탐침봉으로 소리를 쫓았다. 그는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며 분명 여기가 확실한데 하고 뒷말을 흐렸다. 그런식으로 누수를 쫓으며 남자가 만든 구멍이 세 개였다. 구명마다 누수는 없었고 배관이 삭거나 칠이 벗겨진 곳도 없었다, 점점 그의 행동이 미심적어만 갔다. 머리는 내게만 들리는 초인종 소 리로 지끈 거렸다. 그는 내 안색을 살피며 누수를 찾아다닌 지 30년이 되었지만, 예상대로 누수 되는 모습을 발견하기는 매번 힘들다고 했 다. 그리고 동생의 방을 가리키며 저 방을 살펴봐야겠다고 했다. 아무 래도 살피지 못한 저 방에서 물이 새는 게 분명하다며, 지금보다 더 큰 구멍을 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동생 방에 집착했다. 나는 그에게 작업을 하려면 방안의 물건을 다 옮겨야 하는데, 그러기 에 짐이 너무 많아 오늘 끝내기는 힘들 거라고 우선 뜰어놓은 곳부터 다시 살피자고 했다. 남자는 안에 귀중한 것이라도 들었냐 말하며 동 생의 방 문 앞으로 다가셨다. 그를 가로 막으며 물건이 쌓여 발 디딜 틈조차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자는 장갑을 벗어 특특 털고는 조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입이 마른지 몇 차례 입맛을 다셨다. 남자는 집요했다. 한번만, 딱 한번, 아주 잠깐 보기만 하겠다며 문 쪽을 서성였다. 내가 비켜서지 않고 버티자 그는 짧게 혀를 차.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역 했다. 그는 차에서 가스식탐지기를 가져 오겠다고 했다. 청음식누수 107 page 탐지가 안 먹히면 다음은 가스로 누수를 탐지하고 그래도 못 찾으면 열화상카메라를 이용해야 한다고. 그래도 못 찾으면 그때는요. 파놓은 구멍은요? 그럼 저 방을 뜰어봐야지 뭐. 그는 곧 돌아 을 테니 꼭 침실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남자는 구멍만 남겨둔 채 놀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대신 그것을 가지 러 다녀올 수만도 없었다. 남자는 가방을 어깨에 메려다 도로 내려두 고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그는 현관을 나서며 금방 오겠다는 말 을 한차례 더 하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의 발소리 가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 쯤 고양이가 소파에서 나왔다. 동생은 그것 을 안아 올렸다. 고양이의 이름은 사진관이 위치한 동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사진관을 열고 처음 방문한 손님이 바로 이 고양이라 며 귀하게 모셔야 한나고도 했다. 삼날이는 진고동색 털에 검정 줄무 늬를 가진 길고양이였다. 내가 만지려 손을 뿐치자 고양이는 기척을 느끈지 이를 드러내며 발톱을 허공에 획획 그었다. 먼저 다가올 때까지 그냥 뒤. 그럼 이 녀석이 다가올 거야. 그러면 그 때, 그때 만지면 돼. 동생은 고양이를 바낙에 조심히 내려될다. 그것은 난로 가까이로 가 혀로 털을 정리했다. 이곳까지 왔는데 어디 갈만한 곳이 없을까 하니, 동생은 언 바다를 본적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내젖자 동생은 보러 가지 않겠냐고, 사람도 없고 조용한 그런 데가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외투를 걸쳐 입고 언 바다로 나섰다. 고양이는 부동의 자세로 우리를 지켜봤다. 동생은 가게 문도 잠그지 않고 불만 꺼둔 채 사진관 108 page 을 나왔다. 어듬 속 고양이의 두 눈동자가 동그랑게 빛났다. 동생의 말다로 바다는 얼어 있었다. 얼음 위로 쌓인 눈이 만든 백색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깨진 얼음장 아래로 물이 드러났다. 아 래 바다는 거침없이 앞으로 뒤로 움직이고 있다. 저곳에 빠지면 우리 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온몸이 얼음물에 빠진 듯 소름이 돋았다, 한파에 유난히 조용한 바다를 보며 이런 모습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 각했다. 동생은 앞서 걸으며 '여기는 성수기에도 사람이 없어. 나의 주 무대지.' 하고 싱겁게 말했다. 해가 바다 끝으로 지고 있었다. 동생의 109 page 한쪽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꽤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방파제 를 빙 둘러싼 시멘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다에서 자주 보는 것이었지만 매번 이름을 몰랐다. 동생에게 그것을 가리키며 저 삼발이 같은 게 뭐냐고 물었다. 네발짐승 테트라포드, 저 녀석이 파도를 다 잡아먹어, 저 녀석 주위 에는 아무도 없지. 네발의 짐승은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짐승은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더 거대했고 표면이 매끈했다. 테트라포 110 page 드는 서로를 의지하는 듯했지만 세 개의 발로 홀로 섰고 한 개의 팔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것은 서로가 다가 설 수 없도록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듯 했다. 동생은 공중으로 튀어 오르듯 하더니 테트라포드 위에 올라섰다. "접근 금지'풋말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생을 시야에서 가리웠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까치발을 했다. 동생은 테트 라포드 사이사이를 가게 튀어 오르며 건년다. 나는 망설이다 동생 을 따라 테트라포드 위로 올라섰다. 사이의 구멍으로 잠잠한 바다가 흐르고 있다. 그것이 부셔 놓은 파도였다. 구멍은 어른 한명이 들어갈 정도로 켰고 깊이는 3미터가 넘을 늦싶었다. 기운 해가 더 붉어졌다. 우뚝 숫은 붉은 등대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등대를 가리키며 등 대가 타오른다 하고 소리쳤다. 돌아본 곳 어디에도 동생은 없었다. 우리가 걸어왔던 지점을 다시 눈으로 쫓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보이 질 않는다. 테트라포드 사이를 걸으며 구멍 속을 살펼다. 동생이 거기 어던가에서 숨죽이고 내가 찾기만을 기다릴 것 같았다. 테트라포드를 옮겨 다니며 동생에게 물었다. 이곳에 구멍이 몇 개나 될까. 백 개 아니 천 개도 넘을 걸. 누수탐지기의 전원을 켜 목에 걸었다. 무게에 목이 앞으로 쑤욱 밀렸 다. 헤드폰을 쓰고 탐침봉을 들자 제법 누수기사를 닮아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탐침봉을 구멍에 찔러 넣었다. 주방과 화장실 그 리고 거실. 세 개의 구멍 중 어느 곳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침실의 나무문을 바라봤다. 문에 새겨진 나무옹이 가 귀신처럼 입을 쩌 벌리고 있었다. 천장의 얼룩도 눈을 좌우로 살피 111 page 며 조금씩 침실 쪽으로 향했다. 우는 벽지는 벌어지며 침실 손잡이를 때렸다. 삐뚜름히 치워진 변기에서는 아래층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 다. 고양이가 발톱으로 문을 굽었다. 침실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는 방 에 들어갔다. 계기침이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음으로 가득해진 헤드폰을 기계와 함께 바낙에 될다. 방 어던가에서 물이 세는지 바닥 이 축축하다. 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내 쪽으로 흘렀다. 나는 발이 젖도록 그냥 내버려다. 물은 시트를 타고 침대로 젖어들었다. 침대 위로 피로해 보이는 누군가가 오래 미뤄온 잠을 자듯 조용히 자 고 있다. 그의 옆모습이 지는 해에 불그레하다. 잠는 얼굴을 조용히 지 켜보다, 포개듯 그의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구멍을 찾았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찾은 것 같다고 했다. 쥐어 잡은 그의 손이 따뜻하나. 삼날이가 어느새 발치로 와 혀로 제 털을 정리했 다. 우리는 삼달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잡은 손이 축축해져왔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누수 로 젖은 시트의 얼룩 위로 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112 page 나는 등대섬으로 간다 제9회 능대문학상 우수상 / 소설(단편) 김세인 별들이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심하게 가물거린다. 덴바람 속에 허옆 게 뒤집힌 바다가 떠오르고, 고깃배를 타고 나간 아빠가 생각난다. 난 아빠가 묻으로 돌아올 때까지 바다가 성질머리를 부리면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든다. 그나마 별들의 까물거림과 파도소리의 길고 짧음이 상응하고 있다. 그것은 바다의 숨결이고 맥박이다. 그 순간, 시커먼 물 체가 수면위로 숫구친다. 나는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선장님. 흑치가…."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농어대가리가 이마를 맞추곤 발부리에 떨 어진다. “그 괴물을 한번만 더 들먹거리면 죽을 줄 알아. 알아들었어!” 113 page '진짜라니까요! 흑치가 나타났어요." '괴물의 밥이 되고 싶어 환장했어!" 백야의 얼굴이 혐악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백야의 포악함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도마에 회칼 을 꽂고 갑판난간으로 다가선다. 흑치가 있던 수면엔 별빛만 쿨럭인 다. 그가 혔웃음을 쏟아낸다. 백야의 웃음소리가 나의 몸을 칭칭 동여 매버리는 것 같다. 난 별빛 가득한 바다를 휘둘려본다. 물새 한 마리가 끈 떨어진 추처럼 수면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부리에 물고기가 물려 진다. 물고기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먹이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무르는 곳이 다르면 운명도 달라지는 걸까. 백야는 밤바다에 머무르다 인조발목을 달았다. 그때부터 눈빛이 변 했다.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다를 노려보는 시선은 낮설다. 나는 조심스럽게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엔 여러 종류의 생선과 반찬이 부패하는 중이다. 난 곰팡이 꽃이 핀 음식물을 계속 방치하고 있다.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들을 두고 볼 심사다. 맞다. 백야가 처음 부터 난폭했던 건 아니다. 흑치에게 발목을 잃고 난 뒤부터다. 백야는 농어를 기절 시킨 다음 칼을 들어 단번에 대가리를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옮어낸다. 농어가 꿈틀대며 아가미를 들썩인다. 느 닷없이 잘려나간 참상에 대해 농어아가미가 항변하는 것 같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시 박힌 농어살녕이를 우적우적 썸어 삼킨 다. 입안에서 한가득 생선가시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난 생선내장을 바다로 내넌진다. 버려지기 무섭게 물새 차지가 된다. 114 page 수족관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운석처럼 천천히 물속을 헤집고 다닌다. 난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물고기처럼 입술을 뻐금거려본다. 백야가 혀를 끌끌 차며 욕설을 퍼붓는다. 난 맞설 수 없다. 115 page 2 나는 포구에 앉아 바다를 응시한다. 심장이 콩콩 뛰고 조바심이 인 다. 내가 우물쑤물하고 있는 사이에 아빠가 영영 바다에 머물러버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간, 별빛에 물든 이랑이 파도꼭지를 세 운다. 난 숨을 죽인 채 수면을 응시한다. 거무스레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어눔자락 저쪽에서 어릿거리는 환영이 아니다. 흑치다. 그의 모습이 물위에 떠서 어른거리는 별빛에 어렴풋하게 비쳐 보인 다. 흑치는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를 바다와 나누며 진한 먹물 같은 눈 물을 뽑아내는 것 같다. 어쩌면 한없는 심해공간과 흑치의 영혼은 연 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심해에서 뽀어온 끈 하나가 나를 아매고 있는 것 같다. 난 그 끈을 따라 어디쯤 있을 아빠에게 한 발짝씩 걸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는다. 맞다. 덴바람 속에 허옆게 뒤집힌 바다와 그 위를 날려가는 고깃배가 그려진다. 고깃배엔 아빠가 타고 있다. 바람개비 끝에서 울음소리가 나고, 갑작스럽게 용오름이 일어난다. 그 용오름과 함께 파노덩이들이 하늘로 치숫고, 고깃배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곤 뒤집혀 버린다. 절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문득 누군가의 눈길이 나에게 날아오고 있는 듯한 예감에 사로잡힌 다. 난 고개를 돌린다. 선술집 이모다. “아빠 생각하는 거야? 출출하지. 뜨거운 국에다가 밥이나 먹자. 이모는 낮고 부드럽게 말을 건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파도 소 리가 많이 거칠어져 있다. 포구까지 날려온 물결들이 허영게 거품을 토하며 둔다. 나는 조약돌을 집어 들어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내던 116 page 진다. 그렇다. 나는 반월도에서 고깃바를 반년동안 타고 있다. 처음부 터 선원이 된 건 아니다. 그랬다. 나는 반월도 포구에 앉아 목 놓아 울었다. 위로를 해주거나 인사말을 건네는 상냥한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결눈질로 힐끗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길고 고단한 밤과 낮이 지나갔다. 달에 이 끌린 밀물의 찰랑거림이 전을 파고들었다. 난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뒤척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여러 날 밥을 먹지 못했다. 현기증에 바다가 부영게 흐려보였다. 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어린것이 반월도엔 왜 왔을까?" 선술집 이모는 나의 입에 미음을 떠먹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117 page 그 뒤로 사을을 꼬박 않았다. 옴짝날싸 할 수 없었다.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들꼼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양철 지붕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나는 신음 속에서 깨어났 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넘 나간 표정으로 도리질을 했다. 혔것을 보는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입안의 마른 침도 삼키지 못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빠?' 응납이 없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환각이라고 생각하기엔 아빠의 환영이 너무 또라기만 했다. 난 포구로 걸음 했다. 안개가 바다 위로 낮게 깔리어있었다. 포구엔 출항을 준비하는 배와 귀항을 하는 배들이 뒤엉키어 북적였다. 나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누비는 상상을 해보았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속에 스며는 질병보다 두려운 건 배를 타지 못한나는 거였다. 뱃 일을 거들긴 너무 왜소하고 어려 보인 탓이었다. 나는 실날같은 희망을 붙잡고 보름을 버덮다. 희망은 점점 닮아 갔고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포구로 걸음 했다. 한낮의 해가 사막처럼 바다를 이글이글 태우고 있었다. 숨이 혹흑 막히고 다 리에 힘이 풀렸다. 열기보다 더 독한 아릿한 해감내가 머릿골을 흔들 어됐다. 아빠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는 왁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아빠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에 서 한세월을 보냈다. 인천바다와 물을 오가던 아빠는 반월도에 다녀 오겠다고 했다. 나는 인천항에서 야빠의 소식을 묻는 종이배를 띄웠 118 page 다. 수식이 없었다. 그 흔한 전화 한통 없었다. !년이 지났다. 마루 밑 누령이가 달을 베어 물고 컴컴 어됐다. 몰 콜이 처참한 남자가 몸을 기우뚱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셨다. 마루에 주저앉은 남자는 엉금영금 기다시피 문지방을 넘었다. 그렇게 기다리 던 아빠였다. 하지만, 부러부리하던 눈매는 사라지고 진물이 배어나는 동태눈을 달고 있었다. 나는 밤새 아빠 결에 앉아 팔다리를 주물렸다. 아빠가 나른한 꿈속 으로 빠져들기를 기다렸다. 허사였다. 야빠는 홀쩌홀찍 울음소리를 내었다. 난 말없이 달빛만 쳐다보았다. 잇새사이로 한숨이 비집고 나 왔다. 일주일이 지났다. 아빠는 휘이회이 그둘을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눈에 파란 바닷물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아빠는 인 천항에 쑤그리고 앉아 속절없이 밀려드는 이랑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나는 굽어있는 아빠의 등짝을 보았다. 쿨을 훌썩이지도 어깨 를 들썩이지도 않았지만 이내, 아빠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 다 큰 남자가 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슬그머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야빠의 얼굴은 우울하고 처량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어디 갔다 은 줄 알아?" 나는 망설이는 아빠를 향해 호기를 부렸다. “물고기가 물에 살면 죽어.” 아빠는 형량을 다 채우고 나가는 죄수처럼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난 고개를 돌렸다. 119 page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흠쳤다. 아빠는 물고기와 같은 족속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그렁한 눈으로 작별인사를 하면서도 나의 표정을 살피느라 급급했다. 난 아빠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자주 입 꼬리를 올리고 역지웃음을 지었다. 사량하고 미워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그걸 받아들이고. 서로의 애증을 지우기 위해 몸서리치는 밤이었다. 나는 부어오른 아빠의 눈두덩에 열음을 올려주었다. 더 이상, 그 어 디에도 기탤 곳이 없다는 허전함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거리낄 게 없 다는 후련함이 밀려들었다. 결국, 아빠는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 그 뱃길은 다시 묻으로 순환되지 않았다. 눔지도 죽지도 않는 시간 속에 머물러버렸다. 난 보름이 넘도록 배를 타지 못했다. 그저 물에서 멀어지는 배를 바 라볼 뿐이었다. 간혹 뱃고동소리가 밤공기를 찌도 했다. 난 넣 나간 사람처럼 포구에 앉아 입귀를 일그러뜨리고 차게 웃었다. 그 순간, 누 군가가 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흘끔 결눈질로 뒤돌아봤다. 선술집 이모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야릇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 내가 뱃일을 알선해 줄까?" 나는 발딱 일어서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춤을 추었다. 딴 존재로 변한 듯 펼떡펼떡 뛰고 괴성을 내질렀다. "너도 등대섬 왕자님과 같은 족속이구나." 이모는 등대섬에 산다는 왕자를 그리며 살았다. 왕자 없는 세상은 사막이었다. 이모는 몇 번이고 혀를 차곤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앙상 한 손으로 이모의 등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모는 몸을 외 120 page 들고 어깨를 들썩였다. 다 큰 여자를 이토록 울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난 이모를 안아주었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고 사는 건 너무 아픈 삶 이라고, 너무 외롭다고, 포기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느나고 묻고 싶 었다. 이모는 무거운 한숨 소리를 내었다. "난 왕자님을 원망 안 해. 나도 언젠가는 등대섬을 찾아 갈 거야. 난 그 왕자님 때문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거야. 이모의 목소리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 막의 단물을 그려보았다. 몽글몽글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이 몸 안 어 딘가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뱃일은 힘들어. 백야 선장의 성질머리도 고약하고. 난난히 마음먹어." 바" 나는 짧게 대답했다. 굳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저 배를 탈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렀다. 난 이틈날,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갔다. 비구름을 머금은 수평선은 아름다웠다. 벌거벗은 파도꼭지가 은가루처럼 수면위로 치숫아 올랐 다. 바다는 정말이지 환상이었다. 낮이면 물갈래가 희부영게 갈라지 고, 밤이면 바다가 달빛에 젖어 무슨 축제를 벌이는 양 반짝반짝 아름 납기까지 했다. 얼핏 보면 똑같은 파도 같지만 전혀 똑같지 않았다. 파도는 제각각 다른 집을 짓고 살았다. 나는 백야의 신호에 맞춰 하루에 두 번씩 그물을 넌졌다. 백야는 숨 을 죽인 채 바다를 응시했다. 그가 아하,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물 은 오래지 않아 물고기를 쓸어 남았다. 그 모습이 물 위에 떠서 어른 121 page 거리는 별빛이 어렴풋하게 비쳐 보였다. 백야는 조심스레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으로 고기다운 고기를 잡았다. 그물엔 은백색으로 물든 고기떼가 늘어 붙어있었다. 정말 그랬다. 물고기 꼬리치는 소리와 파도소리가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꼭두 새벽에 출어한 고깃배들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물을 풀었다. 조업 특성상 어구를 보수하면서 고기를 잡는 까닭이었다. 어장도 한철이었다. 바다엔 고깃배들이 가쁜 숨을 혈떡이고, 수면 아래엔 수천 마리의 물고기 떼가 반짝거렸다. 백야가 조심스럽게 뱃머리를 돌렸다. 배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물끄는 불이 탱탱하게 당겨졌다. 그때였다. 나는 문득 싸늘한 기 운을 느겼다.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수 122 page 면위로 커다란 물체가 나타났다. 검게 빛나는 물체가 이리저리 주등 아리를 흔들었다. 먹이의 크기를 가능해 보는 것 같았다. 난 아랫입술 을 사려 물고 거대한 물체를 보았다. “선장님! 검은 물고기가 나타났어요." 백야는 잠시 경직되었다가 이내 두 눈이 확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애꽂은 눈만 부릅든 채 물고기의 움직임을 좋았다. 나는 큰 소리로 물었다. “온몸이 검어요. 저런 물고기도 있나요?" 흑치가 곧장 다가왔다. 딱 벌린 아가리 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보 였다. 백야는 재빨리 작살을 내던졌다. 몸통을 찔린 녀석이 넓게 원을 그리며 세찬 물결을 일으켰다. 하마터면 고깃배가 흑치의 꼬리에 맞 을 뻔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백야는 뱃머리를 돌렸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수면을 응시했다. 흑치의 모습이 물 위에 떠서 어 른거리는 석양에 또하게 비쳐 보였다. 백야는 작살을 단단히 움켜 쥐고 엔진마력을 높였다. 찰부락, 하는 소리와 함께 흑치가 수면위로 뛰어 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장님 조심….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야의 한쪽발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 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가 나의 머리를 스쳤고, 곧이어 발부리 에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하지 만 머릿속엔 흑치의 영상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랬다. 흑치는 오래전부터 미지의 대상이었다. 가끔 해안가로 몸통 123 page 이 찢겨진 상어가 떠밀려오곤 했다. 몸통엔 날카로운 이빨자국이 또 렸이 남아있었다. 이모는 흑치의 흔적이라고 믿었다. 섬처럼 떠다니 다가 배가 접근하면 성질머리를 부리곤 했다. 너무나도 엄청난 완력 이어서 아무리 큰 고깃배라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흑치는 등대섬 왕의 눈물로 태어났다고 했다. 124 page 아주 먼 옛날. 등대섬은 지구에서 유일한 섬이었다. 그러니까 오대양 칠대주가 생성되기 전, 지금은 우리가 태평양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등대섬은 정말로 켰다. 등대섬의 서쪽해안엔 가 슴팍이 떡, 벌어진 건장한 선원들이 주로 살았다. 등대섬 사람들은 지 구상의 바다를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서 '오대양'이라고 불렀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빙양, 남빙양이었다. 그런데 오대양에 거 대한 땅이 생겨났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극 이었다. 모두다 등대섬 사람들의 이웃이기도 했다. 위대한 메소포타 미아 문명도 지구촌 꽂곳의 문명과 신화도 싶은 등대섬 문명의 자취 에 불과했다. 세계를 식민지화 했던 왕들도, 이전의 왕들도, 각종 신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도, 모든 나라의 온갖 전설도, 모두 등대섬에 서 온 것들이었다. 125 page 그랬다. 등대섬 왕은 지구의 모든 지역으로 배를 띄워 보냈다. 시인, 의사, 농부, 과학자, 마술사,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 속에 등장 하는 신들의 기록까지도 함께 보냈다. 등대섬 왕자도 그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왕자는 왕에게 미지의 항해를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왕이 아들의 말을 들어줄리 없었다. 등대섬의 빛줄기를 받아 태어난 왕족은 어눔이 몸에 당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왕자는 왕을 속이기 시작했다. 배에 휘황한 빛 덩이를 매달고 바다에 떠있는 섬들을 찾아다녀. 은밀한 항해를 즐기던 날, 바다가 하양게 뒤집어졌다. 바람은 더 세차졌고 파도는 구 거대해졌다. 왕자의 배 는 파도에 짓이겨지면서 늦대와 갑판과 고물과 이물에 걸어둔 빛 덩 이들이 깨어져 나갔다. 그 여파로 왕자의 가슴팍에 검은 구덩이가 패 이고 어눔이 몰려들었다. 등대섬에서 휘황한 불빛을 쏘아주었지만 먹장구름에 가려졌다. 그 여파로 어눔이 왕자의 몸을 녹여버렸다. 왕은 바다를 휘휘 둘러보곤 눈물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엔 물거품이 되어버린 왕자의 형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꾸짓고 또 꾸짓 어도 밤이면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닐 왕자의 환영을 어떻게 떨쳐 버 릴 수가 없었다. 왕은 이리저리 엉켜버린 운명의 끈을 특 잘라 내는 심정으로, 왕자를 검은 물고기로 환생시켜 주었다. 그때부터 왕자는 마음껏 항해를 할 수 있었다. 벌도 함께 내려졌다. 1년에 한 번씩 인간 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은 딱 일주일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혈관의 피마저 딱딱 하게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흑치가 나의 아빠이고, 이모의 연인 127 page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심장의 피돌기가 빨라졌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놀라서가 아니다. 그 얘기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이지 흑치의 눈매는 아빠의 눈매와 넓아있었다. 문제는 백야였다. 그는 흑치의 얘기를 믿지 않았다. 어쩌다 이모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다. 난 등대섬과 흑치얘기는 전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흑치는 그 고독을 날래 기 위해 몇 개월씩 식탐을 부리기도 하고, 몇 개월씩 배설을 했다. 그 배설물엔 물고기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흑치는 자신의 먹이를 가로채지 않으면 뱃사람이나 고깃배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날, 백야는 흑치의 먹이를 가로 대가로 발목을 잃고 인조 의족을 달았다. 3 선술집 이모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야자수가 가슴께부터 무릎 아래 까지 내려가면서 점점 커지는 파란원피스다. 원피스엔 눈이 시릴 정도 의 파란 바다와 섬이 가득 그려져 있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남태평양 어던가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파란원피스와 상관없이 선술집은 버려진 남배꼼초와 생선가시로 어수선하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연다. 조금씩 뿌려지넌 놀빛이 핏물처럼 진해진다. 난 손을 내밀어 놀빛을 받아본다. 붉은 독처럼 차오르는 아찔함 때문 에 눈이 아파온다. 나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혼찾말을 중얼거 린다. 외롭고 쓸쓸하게 눔어가진 않을 거야. 난 그곳으로 갈 거야. 128 page 그때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백야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장님 오셨어요.” 이모는 비음이 잔득 섞인 목소리로 녁살좋게 반긴다. 백야는 흐느적 거리며 이모에게 다가선다. 그리곤 순식간에 손을 뻔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이모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휘 두른다. 나는 백야의 머리칼을 잡아당기거나 웃자락을 붙들고 늘어진 다. 순식간이다. 백야가 모로 누워버린다. 이모의 손엔 프라이팬이 쥐 어져 있다. “흑치에게 발목을 잃은 것이 나 때문이야. 잊을만하면 선술집을 박살 낸다니까.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려. 바다가 주는 만큼만 잡아야지.” 이모의 동공에서 물기가 배어나온다. 파란원피스에도 핏물이 파문 처럼 번지고 있다. 그녀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다아낸다. 나는 아픔을 느까. 처음엔 몰랐지만, 경련 같은 떨림은 어느 순간부터 가슴팍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시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술을 나누어 주는 선술집. 나는 어렴프시 느낄 수 있다. 그곳을 찾아 떠나야 할 시 간이 머지않았음을. 그것은 순환이다. 아니, 환희이고 희망이다. 난 이모 앞으로 걸음 한다. 손에 술잔이 들려 있다. 나는 반사적으로 열굴을 가린다. 술잔 대신 때수건이 날아든다. “깨끗이 쏘 와. 그게 뭐니. 여자애가." 이모가 채워놓은 알루미늄 양동이에서 더운 김이 올라온다. 나는 웃 129 page 을 벗고 머리위로 물을 쏟아 봇는다. 구정물이 흘러내린다. 때수건에 비누를 묻혀 꼼꼼히 낚아낸다. 머리를 행군 마지막 물에 옷가지를 남 그고 방으로 들어선다. 이모가 새 옷을 내민다. “선물이야.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모는 연거푸 술잔을 비우곤 바다로 눈길을 옮긴다. 눈동자엔 핏빛놀이 뒤룩거리고 그렁한 눈물이 남겨있다. 놀빛 속에 이랑을 감춘 바다도 제각기 찰랑 찰랑 소리를 낸다. 난 심장의 피돌기가 빨라진다. 그것은 가슴팍에 단난히 뭉쳐진 아련한 연민이다. 놀빛이 부서지는 저녁. 이모는 술을 마시고 나는 술주정하는 이모 결에서 전설의 얘기 에 빠져는다. “왕자님이 너무 그리워, 죽을 것만 같아." 이모가 울음을 내놓는다. 그것은 포구에서 홀로 펴덕이는 병든 물새 같은 서러움이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세상에 홀로 나와 가사도우미, 공장허드 렛일, 술집종업원등 온갖 굿은일을 전전하며 살아온 서러움이다. 이모 가 살아온 세계는 지하의 통로처럼 어눔고 싸늘하나. 사람들은 아무도 이모를 위로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그런 이모를 사랑으로 대해 준 유일한 남자는 왕자님이다. 왕자님을 처음 본 순간, 이끼조차 자라지 않넌 가슴에 서서히 물기가 생겨났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다. 왕자님은 배를 타고 반 월도에 들렸다가, 기약 없는 사랑의 씨앗을 떨구고 떠났다. 이모는 등신처럼 반월도를 지키며 살았다. 누군가가 돈 한 푼 가져다주는 일 131 page 이 없었고, 쌀 한줌 주는 이도 없었다. 이모는 그렇게 왕자님을 그리며 선술집을 열었다. 뱃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초라한 선술집이었지만 성 대한 축제장 같았다. 뱃사람들은 세심하게 배려해 주곤 했다. 전어를 잡아오면 전어를 가져다주고, 농어를 잡으면 농어를 가져다가 주었다. 나는 어장을 나가지 않는 날엔 선술집 일을 거는다. 뱃사람들은 이모 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으면서 별 까닭 없이 호들갑스럽게 웃고 떠들 어댄다.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등출기가 끈끈해진 다. 이모가 나의 손을 꼭, 잡고 부르르 몸을 떨어댄다. “파도소리가 너무 아름답게 들려." 이모의 동공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왕자님에 대한 그리움이 기도 하지만, 자신에 대한 설움이기도 하다. "파도소리를 들으면 살가죽 여기저기에서 비늘이 돋아나는 것만 같 아. 그래서 물고기가 될 것만 같아. 내가 물고기가 된다면 이 바다 저 바다를 휘질러 다니고, 목구멍에서 피가 괄 쏟아지도록 사랑노래를 부르고 싶어.” “이모. 나도 등대섬에 가고 싶어요. 그곳엔 분명 아빠가 살고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바다가 파란이유를 아니?` “바다가 파란이유?` 이모는 바다에서 들어오는 파도소리처럼 낮고 조용하게, 또랑또랑 말문을 연다. "바다는 원래 흰색이었어. 한데, 등대섬 왕자님이 어눔에 같혀 물거 품이 되어 버렸다. 132 page 슬픈 일이지. 왕과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려야 했어. 그 눈물이 모 이고 모여 바닷물이 파랑게 변한거야. 그래서 시린 물빛은 눈물인거 야. 난 등대섬과 왕자님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 이모는 시린 물빛에 젖어 있다. 어쩌면 자신도 어쩌지 못할 사랑에 반월도를 떠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이모에게 있어 바다는 그리움 이다. 나는 이모의 동공에서 스며 나온 눈물 따스하게 느껴진다. 이모는 술잔을 비우곤 입술을 달싸인다. “난 말이야. 흑치 얘기를 듣는 순간 등대섬의 왕자님이 생각났어. 빙 산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흑치 말이야." 이모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등대섬을 그리며 산다. 마치 그곳 태 생의 여자 같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이모는 오래전 그곳의 처녀였는 지도 모른다. 나는 이모의 눈빛에서 아빠의 환영을 본다. 파도처럼 출 렁거리는 등대섬에 얼굴을 묻고, 살 오른 물고기를 쓰다듬는 아빠의 환영이다. 등대섬은 아빠뿐만 아니라 뱃사람들에게 있어 편안한 안식처이자 거친 바다로 부터의 이상향이다. 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심장의 피 돌기가 빨라진다. 그 여파로 벌거벗은 이모의 몸에 비늘이 돋아날 것 만 같다. 새벽녁에 어슴푸레한 안개를 둘고 떠가는 이모의 모습이 머 릿속으로 그려진다. 그 상상은 고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고독감 에 젖어들기만 하면, 등대섬의 시린 물빛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그 것은 환희이기도 하고 가슴 아픈 비애이기도 하다. 이모의 입에선 흑치와 왕자의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몰고, 꼬리 끝엔 133 page 자꾸만 비늘이 붙고 지느러미가 자라난다. 이모의 이야기에 눈물이라 도 묻어날 것 같다. 나는 등대섬과 왕자 얘기를 경청할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얼마나 버거웠던 세월이었을까? 살아온 삶이 결코 가법지 않 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모진 외로움과 설움을 감추려 당찬 모습 만 보여준다. 왕자님를 향한 애듯함과 억척스러움이 눈에 보이는 듯 싶다. 4 별들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심하게 가물거린다. 밤하늘과 밤바다 를 품고 사는 지구의 숨결이고 맥박이다. 그것들은 점차 나의 들슴날 숨이 된다. 수평선엔 이미 수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난 수면을 살펴본다. 파도는 발정 난 수놈처럼 흰 거품을 불어 올리고 있다. 이랑 에 앉아있던 물새 메가 날개를 퍼덕인다. 짧은 순간, 검은 눈동자와 나 의 시선이 엄힌다. 나는 고함을 내지른다, “선장님! 흑치가 나타났어요!" 백야가 뛰어나온다. 숨을 죽이고 수면을 응시한다. 흑치의 검은 눈동 자와 마주친다. 그가 머리를 쥐어뜰고 비명을 내지른다. 몰라보게 행쑥해진 백야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층 더 우울하고 처량해 보인다, “저리 꺼지지 못해. 내 발목으로도 모자라.” 백야는 공포와 의문이 가득 찬 눈빛으로 나와 흑치를 번갈아본다. 무슨 한이 서린 것 같기도 하고, 흑치를 원망하는 눈빛 같기도 하다. 그가 악담을 퍼본 작살을 집어 든다. 134 page 제1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김형수 - 지금은 교신중(밤하늘의 별들과 나누는 이야기) 135 page 나는 그의 빵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가 엉덩방아를 찌며 조타실 로 뒷걸음질 친다. 흑치가 입을 까 앙다문 채 몸을 뒤척인다. 언제나 검은 빛이 감돌넌 눈동자가 조금 변한 성싶다. 나는 백야의 인조발목을 힘껏 내던진다. 인조발목이 숭어처럼 뒤틀 리며 수면 아래로 잠긴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고개를 내짓는 다. 반쯤 넘이 나간 얼굴이다. 바다와 거침없이 싸워왔넌 그노 어느새 왜소해졌다. 그나마 손아귀를 그러쥐고 몸을 떨어댄다. 분명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지치면 무력해지고, 그 무력감은 꽤 오 랜 동안 그를 몸져눔게 할지도 모른다. 수평선에서 검은 먹장구름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난 덴 바람 속에 허영게 뒤집힌 바다로 배를 내몬다. 바람개비 끝에서 울음 소리가 나고, 수면에서 용오름이 인다. 그 용오름과 함께 파도덩이들이 하늘로 치숫는다. 백야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을 떨어댄다. 나는 핸들을 잡고 엔진마력을 높인다. 흑치도 지느러미를 활짝 펼쳐 진다. 백야는 동공이 풀어지고 입술이 새파랑게 변한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주술을 걸 듯 속삭인다. “등대섬으로 가면 눔지도 죽지도 않아요." "난 등대섬을 믿지 않아. 빌어먹을 년아! 날 내버려 뒤!" 발목 의족이 없는 그는 더 이상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나마 수평선 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한 빛이 번득인다. 흑치도 물에 떠 일렁 이며, 가물거리는 별들을 향해 둥등 떠간다. 나는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어눔자락 저쪽에서 어릿거리는 환 136 page 영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휘황한 불빛이다. 흑치가 힘차게 꼬리를 휘 젖는다. 그의 모습이 물 위에 떠서 어른거리는 별빛에 비쳐 보인다. 어쩌면 등대섬에서 뻔어온 빛줄기가 그의 기억의 관을 움아매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도 그 빛을 따라 한 발짝씩 끌려 들어가고 있는 듯싶 다. 백야는 몸을 떨며 악담을 퍼붓는다. "사특한 영물에 흘리면 우린 죽어! 멍청한 넌아!" 하지만 나에겐 아릿한 해감내만 맡아질 뿐이다. 파도 하나가 밀려와 뒹굴면, 그 뒤를 따라서 또 다른 물결 하나가 따라와 마찬가지로 넘어 진다. 얼핏 보면 똑같은 물결 같지만 전혀 똑같지 않다. 그건 환희이 137 page 거나 희망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파란원피스를 입은 이모의 가름한 얼굴을 떠올려본다. 달빛 아래 흐드러진 안개를 뭉쳐 놓은 것 같은 이 모의 열굴은 언제부터가 나의 가슴팍에서 가슴않이를 일으킨다. 그 가슴않이는 아빠를 향한 그리움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난 하늘로 눈길을 옮긴다. 바다에서 살다간 영혼들이 초롱초롱 맑은 눈들을 뒤룩거리고 있다. 맞다. 그 영혼들은 어둠 속에서 제각기 빛을 밝힌 채 바닷길을 알려준다. 문득 가슴 절이는 환희가 밀려든다. 어쩌 면 혹치가 아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둥글납작한 얼굴 윤곽이며, 그렁한 눈매가 분명 아빠와 닮아있다. 난 휘황한 빛줄기를따라 등대섬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제1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 상작 박준선 - 길을 밟히다 138 page 수필(수기) 139 page 제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유유신 - 거문도 등대의 아침 140 page 바닷바람의 지문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수필(수기) 장미숙 어디서부터 발원하여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바람이 한입 물어다 놓은 잔물결이 몽글몽글 피어난 이팝나무 꽃 같다. 바다는 물결을 휘 감고 뒤척인다. 생명의 꿈틀거림이다. 일시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파랑(0238)의 모양은 가지각 색이다. 작고 큰 게 있는가 하면, 동그랑고 모난 것도 있다. 뭉쳐서 움 직이면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이 바람의 오선지를 두드리는 듯하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마구 헝클어진 봉두난발이 되기도 한다. 바다 위로 우뚝 숫은 바위 옆 파도는 유난히 짓굿나. 겁도 없이 높은 바위벽을 기어오른다. 뒤이어 높이뛰기 선수처럼 놀치다가 곤두박질 치기도 한다. 부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거대한 거품을 잉태한다. 부서지는 것들은 망설임이 없다. 시간을 쪼개 그 속으로 거 141 page 침없이 질주한다. 물이 빛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바위를 빙 둘러 거 품이 띠를 두르고 포진해 있다. 바위에는 거친 무법자지만 사람의 눈 으로 보면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다. 아니, 어쩌면 파도와 바위는 상생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해변으로 몰려드는 몰개는 우르르 달려왔다가 와그르르 밀려난다. 물러간 것들은 새로운 파도를 만나 어깨를 마주한다. 섞이고 어울려 끊임없이 손을 잡고 올라오는 파도는 돌무더기에 몸을 부린다. 작고 142 page 큰 돌들이 파도에 쓸린다. 돌은 바다의 싼 기를 몸에 새기지만 오히 려 반지르르 빛을 발한다. 파도가 한 번씩 돌을 품을 때마다 표면은 점점 매끈해지고 두루뭉술해진다. 동글동글한 것들의 옥시글거림이 해변을 생기롭게 한다. 태풍과 비바람으로 세상이 한 번씩 뒤집힐 때마다 어디선가 굴려온 돌은 해변에 터를 잡고 파도와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울퉁 불퉁한 모양으로 개성을 앞세우며 각에 힘깨나 주었을 돌이다. 각이 곡선이 되기까지 돌에 새겨진 시간의 역사가 궁금하다. 돌멤이가 돌 티가 되고 모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파도가 다녀갔을까. 해와 날 도 수없이 바뀌었으리라. 아한 날들을 춤하게 채운 이야기는 화석 으로 굳어갔을 터.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몽돌을 주워 이리저리 살핀다. 흠치르르하고 예쁜 게 제 딴에도 신기한 모양이다. 양손에 몽돌을 주워들고 쪼르르 엄마에게로 달려간다. 해변을 될던 돌의 서사가 아이의 손안으로 옮겨지는 순간이다. 아 니, 한 사람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다. 바다와 바람과 파도와 143 page 햇살이 빛은 몽돌이 아이의 가슴에 작은 희망으로 심어질 차례다. 파도의 무늬가 새겨진 몽돌을 하나 들고 보니 작은 구멍이 송송 나 있다. 사람의 손으로는 조각할 수 없는, 오로지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 놓은 예술품이다. 파노의 역사가 새겨져 있을 것만 같은 돌을 두 손으 로 움켜쥐고 귀에 대본다. 돌 속에 바람이 불고 아득한 생의 파도 소리 가 들려온다. 어린 시절, 내 삶의 바다는 거칠었지만 외롭고 쓸쓸하지만은 않았 다. 강한 어머니는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커다란 바위였고 바위를 지붕 삼아 우리 형제는 가난이라는 파도와 맞섰다. 가난은 자잘한 파도처럼 견널 만했다. 쌀이 부족해도 구황식물이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들이 며 산에 돋아난 나물도 배고픔을 날래주었다. 바다에 잔물결이 일면 아이들이 깨금발로 해변을 뛰어다니듯 들과 산을 오르내리며 우리는 몸의 언어를 배웠다. 그러는 사이 정납고 따뜻한 의초는 저절로 우러 나 서로를 보듬어 안게 했다. 거센 풍랑을 만난 건 보릿고개라는 혐한 산을 넘을 때였다. 어느 해 보렀고개는 모든 걸 말라비틀어지게 했다. 아이들은 노랑게 얼굴이 뜨고 집마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쌀독을 박박 군어대는 소리는 대문이 바람에 널컴대는 것보다 우렁우렁했다. 가장들은 빈 지게를 털털거리 며 집으로 돌아왔고 굴뚝에는 연기가 메말랐다. 마낭에는 마른 흙이 먼지처럼 날리고 우물에는 돌 틈마다 이끼가 껄다. 아버지는 그해 지게를 벗어 던졌다. 태어난 뒤 흙밖에 만져본 적 없는 아버지가 밥을 벌기 위해 항구도시로 갔다. 젊은 아버지는 혈기만 믿고 원양어선을 닷다. 낮과 갱이를 잡넌 손은 그물의 거친 무늬를 닮아갔고 144 page 얼굴엔 바닷바람의 지문이 새겨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선원 생활은 삼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가리를 벌리고 포효하던 시커먼 바다에 빠져 머리를 다친 아버지는 어눔이 가득 찬 바다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몸에는 파도가 터를 잡았다. 아름다운 해변을 어루만 지는 잔물결이 아닌, 태평양의 거대한 해류 속에 같혀버렸다. 아버지의 몸에서 흘러나온 해일은 집을 침몰시키고 끝없는 파도를 만들었다. 느닷없이 뒤집히는 바다의 분노 앞에 선 우리에게 안전한 묻은 멀기 만 했다. 의지할 곳은 어머니의 품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뉘누리에 휘말린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몸에 구멍을 숭숭 놓은 파도였다. 구멍으로는 어머니의 한 숨이 바람처럼 드나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면서 거친 파도는 조금씩 잠잠해졌 다. 약에 의지해 살았던 아버지는 파도를 온전히 나스리지 못한 채 눈 을 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끝까지 품어 안았다. 풍랑 속에서도 자 식들은 자라나 어머니 결을 떠났다. 시골집에 덩그러니 남은 어머니는 외로움이란 너울을 받아들이느라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아버지는 생의 끈을 놓았지만, 파도는 내게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내 몸에도 파도가 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부터 바람 소리에 민감해 졌다. 거센 파도를 만나 생사의 기로에 섰던 이십 대 후반, 간신히 훨 쓸려간 곳에 큰언니의 따뜻한 품이 있었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뉘누리는 설 사이 없이 밀려왔다. 모가 난 곳이 깜이고 깜이기까지 파도가 할퀸 피부는 생채기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 했다.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음인지 몰려오는 바람에 휘청거리다 부 145 page 제2회 아름다운 등대사진 수상작 김영태 - 등대와 파도 146 page 히는 일은 차차 줄어들었다. 땅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구르다가도 일어서는 법을 저절로 배웠다. 파도에 떠밀려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돌이 아닌, 제자리에서 야무지게 파도와 맞 서는 돌의 의연함을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긴 항해 에서 끝내 피할 수 없는 파도라면 차라리 받아들여 몸에 새기자는 오 기도 생겼다. 한때는 잔잔하고 평온한 삶을 얼마나 원했넌가. 그저 평화로운 바다 를 꿈꾸었다. 도란도란 속살거리는 은빛 물결 아래 푸른 속살이 설비 치는 바다의 신비로움과 햇귀가 품고 있는 바림의 오묘함에 매료되곤 했다. 노을 비껴드는 장엄한 풍경을 대하면 생의 열망이 꿈틀거렸다. 삶도 그와 같이 희망이 펄떡거리고 웃음 물결이 번져 나면 좋으련만 그건 난지 이상향에 불과했다. 인생이란 태풍에 뒤집혀 사납게 울부짓는 바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그 무엇, 헤쳐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삶이란 바다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오래다. 파도가 가슴을 할퀴어도 놓아버릴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안다. 앞으로 가야 할 길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도…. 잔잔한 바다 앞에서 조금은 잠잠해진 마음의 바다를 헤아리는 사이 노을이 꽃비처럼 떨어진다. 수만 가지 색을 품은 하루가 바낮속으로 빠진다. 새로운 하루를 잉태할 저 수평선 위로 곰비임비 번져 나는 붉은 빛이 푼푼하게도 찬란하다. 148 page 바다의 시간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수필(수기) 진해자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도착하니 저녁노을 너머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는 후미진 포구에서 휴식하고 있는 고깃배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만선을 위해 먼 길을 항해하고 돌아온 배가 무사 귀향에 안도한다. 사정없이 내몰아치넌 물의 시간, 다시 밀물이 되어 나를 다독여주던 바다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작은 어촌으로 시집온 지가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농촌에서 자란 내가 이 외딴 어촌으로 시집온 것은 오직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 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왜 그토록 바다를 그리워했는지, 나에게 바다는 꿈이었고 등대는 빛이었다. 삶이 쓸쓸하거나 힘들다고 느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다였다. 아이들이 다 자라고 이제 노년의 초입을 서성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은 바다에 머물러 떠날 줄을 몰랐다. 149 page 바다는 내 삶을 수평선 저 너머로 데려갔다가 다시 눈앞으로 이끌고 왔다. 바다와 나는 밤새워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작은 어촌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 결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다. 오늘도 바다로 나가 조가비가 반짝이는 해변을 무작정 걷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끝없는 수평선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150 page 새들의 날짓은 닫혀있는 가슴이 뱅 뜰릴 만큼 자유롭다. 주변은 온통 파도와 바람뿐이지만, 그 어디에도 같은 풍경은 없다, 땅과 바다가 만나는 풍경은 참으로 미묘하다.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의 풍경은 아득하고 쓸쓸하지만, 그곳에서는 어디론가 떠나 고 싶어 하는 바다 동물들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다에서는 삶과 죽음, 어눔과 빛이 함께 어우러진다. 우리의 인생처럼 바다에서도 영원한 기뿔이나 슬픔은 없었다. 기봄은 밀물과 함께 빨리 왔다가 떠나고, 슬픔은 오래 머물다가 물 과 함께 지나갔다.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손님일 뿐이다. 바다의 봄은 거칠고 높은 파도가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태풍이 쓸고 지나간 후에 바다는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고기잡이 나간 뱃사람들은 파도에 쓸려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자식을 낳은 집에서는 숫과 고추를 사립문에 매달았다.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또 어더선가 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태풍이 지나간 아침 바다는 다시 윤슬로 반짝인다, 바다 저 멀리 나갔던 고깃배가 무적소리를 내며 포구로 돌아오고 있 다. 한없이 평온한 모습이다. 소리쳐 우는 바다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힘이었다. 고기를 잔득 싶고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며 드나드는 포구, 포구에서의 왁자지껄함과 부산스러움은 생명의 소리다. 바다는 삶과 죽음의 밑자리를 그리며 끝없이 인생의 상승과 하강을 이룬다. 봄이 가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바다는 더욱 일령이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적신다. 바다는 출령이며 삶을 말하지만, 나는 바다를 다 알지 151 page 못한다. 바나에는 항상 파도가 철썩인다. 그렇지만 파도는 바다의 속을 들여 다보지 못한다. 나도 바다의 겉모습만 볼 뿐 심오한 바닷속을 모른다. 내가 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파도이다. 모든 파도는 바다의 파도다. 낮 동안 그렇게 퍼덕대던 바다가 밤에는 어눔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밤바다에는 파도 대신 어눔이 검게 누워 있다. 거센 파도의 울음도 흐느낌으로 가라앉는다. 한낮의 생동은 모두 사라지고 밤바다는 침묵 속에 숨을 죽이고 있다.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많은 꿈을 키웠다. 마음이 납납하면 달려 가서 둘넌 바나, 바나는 언제는지 찾아가면 너그럽게 안아주넌 어머니 품속 같았다. 어린 나이에 바다를 찾아 떠나버린 딸이 어머니는 항상 걱정이었다. 사흘이 멀다고 전화하여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고 묻곤 하였다. 파도가 바다의 품을 벗어날 수 없듯,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산다는 건 폭풍에 난파된 배와 같았다. 딸의 삶을 그렇게 걱정하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의 마음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이다 돌아서는 바다 처럼 밀려왔다.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시련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태풍이 불어 닥쳤다. 성난 바다는 마을 사람들과 집들을 헤집어 놓고 농작물도 송두리째 쓸고 가버 렸다.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절규했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바다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무심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기다림의 시간 152 page 은 이어졌다. 기다림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속울음을 삼키며 살아 왔다. 내일이면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든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았 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먹먹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만질 수 없는 새벽 별을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희망을 접으면 밝은 대낮도 캄캄할 것이고, 희망을 품으면 어두운 밤도 환할 것이다. 고통 속에 살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출령이는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 아무리 파도가 거칠고 힘들어도 당당히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어쩌면 시련은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계기인지 모른다. 봄이 오기 전이 가장 춤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나를 이겨내야 세상을 이겨낼 수 있듯, 어느 날은 깊은 파도에 휠쓸려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질은 해무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도 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항해다. 누군가에게 가슴을 열고 보여줄 수 없는 상처 앞에서 넣을 잃고 우는 사이, 내 마음은 점차 푸른 바다처럼 변해갔다. 사람들이 가슴마다 간직하고 있는 서러운 사연은 애달프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바다 위를 외로이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본다. 무슨 사연이 있어 비 내리는 바다 위를 날고 있을까. 외롭다는 건 아프다는 것, 혼자 날아가는 저 새의 아픔은 무엇 이며 어디로 가고 있을까. 153 page 삶이 힘들고 고달프면 외로이 서서 바다를 지키는 등대를 찾는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꽂꽂이 제 할 일 하는 등대는 나의 버팀목이다. 등대는 외로움을 빚어 어돔의 바다에 빛을 만든다. 동네 입구에 서 있는 하얀 등대와 빨간등대, 저들은 떠날 때와 돌아올 때를 알려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혀줄 것이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에 맞춰 배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내 인생의 등대를 세우고 싶다. 하루를 잘 살아낸 노을이 오늘떠라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바다로 간다. 바닷가에 서서 오지 않을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는 저 외로운 등대처럼. 154 page 부표의 귀띔 제9회 등대문학상 우수상 / 수필(수기) 박호선 가오치 선착장에서 사량도 가는 여객선을 났다. 여객선은 뱃머리를 돌리며 하얀 물결과 함께 사량도 쪽으로 잼싸게 날려갔다. 사량도는 내가 세파에 흔들려 마음 둘 곳이 없을 때마다 자주 찾는 곳이다. 40분 푸른 뱃길을 달려가면 사량도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 려준다. 마치 나를 안고 날래주는 푸른 요람 같다. 금평리에 도착하여 사량도의 명산인 옥녀봉에 올랐다. 사방은 크고 작은 섬들이 녹색 옷을 입고 푸른 바다를 에워싸고 있었다. 바다는 푸른색을 즐겨 쓰는 어느 화공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고요가 숨 쉬는 수하식양식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량대교 아래로 급물살을 헤쳐나가는 고기잡이배 한 척이 보였다. 내 눈은 나 도 모르게 그 배의 뒤를 쫓아갔다. 155 page 산골 마을에서 자란 나는 스무 살이 념도록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배도 사십 가까이 되어서 울릉도 가는 여객선을 탄 것이 처음이었 다. 파도를 타고 푸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경협은 신선하고도 짜 릿했다. 그 뒤부터 나는 배를 타고 섬 여행을 즐겼다. 제주도, 대마도, 한산도, 흑산도, 홍도 등, 여러 섬을 탐방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고기 잡이배를 타 본 적은 없었다. 사량도에 집이 있는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고기잡이배를 타볼 수 있 겠느냐며 진지하게 청을 넣었다. 친구는 간절함과 호기심이 가득 찬 내 눈빛을 차마 마다하지 못해 고기잡이배 선주 한 분을 소개해주었 다. 예전부터 여자는 배에 태워주지 않았다.'라며 마을 사람들은 수군 거렸다.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외지에서 온 여자이니 더욱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선주는 친구의 청을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어업에 종사하는 '동성호'에 오를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아침, 눅눅한 비바람에 뱃전을 할는 파도 소리가 나지막 하게 들렸다. 배가 시동을 켜자 엔진이 통통거렸다. 동성호는 푸른 바 다를 향해 달렸다. 물길 따라 바닷물이 배에 부히며 하얀 물거품을 이루다가 이내 부서졌다.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쌈짤한 냄새로 다가 왔다. 배는 여기저기 떠 있는 부표 사이를 헤치며 달려갔다. 문득 이 고기잡이배는 주소도 없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 다. 주위에 떠 있는 부표는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색깔도 서로 달랐다. 156 page 그런데 자세히 보니 부표마다 다른 표시가 되어 있었다. 13이나 46 같은 숫자와 909나 110 같은 영문자도 보였다. 또 다양한 모양의 부표 도 바다에 떠 있었다. 아마도 어업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부표들은 주인이 제자리를 찾아올 수 있도록 소리 없이 귀뛰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성호의 부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배는 두어 시간이 넘도록 부표 사이를 날렸다. 갑자기 파도의 포말이 빨라졌다. 그러더니 배가 점점 속도를 줄였 다. 저만치 수면 위에서 부표가 물살에 흔들리며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주인을 불러들였다. 배가 멈추자 선주는 자기만의 부표를 건져 올렸다. 동성호의 부표는 스티로폼으로 된 하트 모양이었다. 그 작은 부표 에는 새끼손가락 구의 불이 묶여있었다. 불로 몸이 묶인 채 부표 는 밤새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려고 애썼을 것이었다. 동성호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 불을 끌어 올리자 바닷속에 잠겨있던 통발어망들이 모습을 드러 냈다. 선주가 기다리던 붕장어는 두세 개의 통발어망에서 잡어들이 나온 후에야 모습을 나타냈다. 파낙거리며 나타난 젯빛과 갈색빛을 떤 붕장어 몇 마리를 보고서야 선주의 구릿빛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 올랐다. 한 부표에는 대략 서른 개가량의 어망이 듬성듬성 엮여있었다. 애써 건져 올린 통발어망이 비어있거나 온갖 해초가 들어있을 때도 있었 다. 어떤 어망에는 소라, 고동이 붕장어와 함께 잡혀있었다. 그것들은 157 page 종류별로 분류되어 각각 물통에 담겼다. 어린 물고기들은 바다로 되 살려 주기도 했다. 나는 줄줄이 올라오는 통발에 는 어획물들을 보며 바다가 보물이 가득한 창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업은 주로 가족노동에 의존하는 모양이었다. 동성호의 선원은 아 버지와 아들이 전부였다. 좁은 배 안에서 부자간은 말이 없었다. 비바 람을 막아주는 천장 아래로 어망을 끌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기계적 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붕장어가 줄줄이 잡일 때면 한결 손길이 가벼워 보였다. 겉으로는 말이 없지만, 깊은 물속에서 딸려 나온 토실토실한 붕장어가 남긴 통발어망을 바라보는 시선은 똑같이 흐못해하는 모습 이었다. 미리 던져놓은 통발어망에 붕장어가 얼마만큼 들어차 있는지는 아 158 page 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작업인 셉이다. 어쩌면 복권 당 첨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통발어망이 올라올 때마다 기뽑과 실망이 소리 없이 교차했다. 그물로 싼 통발어망 안에는 어획물과 함 께 그들의 희로애락도 담겨 있었다. 체격이 좋고 아버지를 닮아 눈빛이 선한 아들은 섬을 떠나 육지에서 직장을 다녀고 했다. 누구에게나 타지에서의 생활이 어려운 것처럼 아들도 녹록치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들은 인생의 파도가 치는 바다 에서 아버지라는 부표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부표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동성호를 타고 매일 부표의 귀에 귀 기울이며 바다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획이 끝난 물때 묻은 통발어망을 자동 물 분사기로 세척했다. 해저 의 진흙이 거센 물살에 떨어져 나갔다. 띄엄띄엄 묶은 통발어망을 무 159 page 게를 지탱할 수 있는 돌을 날아 부표와 함께 바닷물 아래로 넌져 넣 었다. 돌은 수심 2020 아래로 사라지고 바다 위에는 또다시 하트 모양 의 부표가 따. 푸른 물결에 흔들리면서도 절대 가라앉지 않을 부표 가 지 든든해 보였다. 시퍼런 물살을 가르며 작은 불을 끌어안고 산 세월이 사십 년이라 고 했다. 사량도의 인근 바다에는 부표와 불이 핏줄처럼 이어져 있 었다. 그 가느다란 불을 끌어당기고 풀어주는 동안 얼키설키 엉키어 밝고 닮은 이음새가 보였다. 오랜 고난의 세월을 발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동성호 선주의 삶 속에서 부표는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희망이 었지 싶다. 녀울이 치고 태풍이 불어도 다시 그 희망을 찾아 배를 띄 웠을 것이다.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들 책가방 끈을 늘리고, 조금씩 살 림도 늘려갔을 것이다. 이제 아들에게 부표의 귀을 잘 알아듣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그가 마지막 부표를 던지고 허리를 다. 거친 가람과 따가운 햇별에 그을린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잔잔한 물결처럼 번졌다. 온종일 바다에 내어준 시간이었다. 어느새, 하늘은 구름을 헤집고 밝 게 개어 햇살을 눅 받은 질푸른 파도는 윤슬로 반짝거렸다. 청정해 역 저 멀리 또 다른 부표처럼 작은 집 한 채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어부들을 위하여 통영시에서 설치해 놓은 바다 화장실 이었다. 선주 님이 “여기 가서 볼일 보세요” 하며 귀뜰 해주셨다. 그러지 않아도 소변이 마려워 눈앞이 노랬넌 참이었다. 배를 움켜쥐며 안절부절 견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볼일이 끝난 후 팽창했던 내 아랫배는 해산한 늦 가벼웠다. 그 빨간 부표는 나를 위기에서 구출해준 고마운 160 page 부표였다. 내일의 만선을 기약하며 돌아오는 길, 동성호가 이번에는 사량도를 향해 날렸다. 저 멀리 사량도가 보였다. 사량도는 여전히 푸른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파도에 쉼 없이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 고 있는 사량도가 문득 커다란 녹색 부표처럼 보였다. 사량도라는 또 다른 바다의 부표가 내 가슴에 떠올랐다. 그 아름다운 부표가 내게 살며시 귀했다. 살다가 행여 길을 잃거는 언제든지 나 를 찾아오라고. 가슴으로 잔잔한 물결이 지나갔다. 순간 추억이라는 돌을 단, 흔들리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부표 하나가 가슴 깊이 내려졌다. 나는 그 녹색 부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162 page 제9회 등대문학상 수상 작품집 발 행 일 : 2021년 12월 10일 발 행 인 : 울산지방해양수산청장 박용한 울산항만공사 사장 김재균 한국항로표지기술원장 박계각 발 행 처 : 울산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 울산항만공사 기획조정실 한국항로표지기술원 주 소 : (울산지방해양수산청)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88번길 6 (울산항만공사)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71 (한국항로표지기술원)세종특별자치시 아름서1길 13-9 다올비지니스센터 6증 601호 전 화 : (울산지방해양수산정) 052-228-5680 (울산항만공사) 052-228-5351 (한국항로표지기술원) 044-850-7512 올산지방해양수산정 울산항만공사 한국앙로표지기술원 163 page 제9회 등대문학상 대상 시(시조) 손나래 등대의 빛 (손석만) 최우수상 소설(단편 신수나 메르쿠리우스의 달 수필(수기) 지영미 해무 우수상 시(시조) 박복영 등대마을 이야기 시(시조) 신춘희 슬도 시(시조) 이은서 핑권의 눈물 소설(단편) 조계희 고요한 위안 소설(단편 백종희 누수 소설(단편 김세인 나는 등대섬으로 간다 수필(수기) 장미숙 바닷바람의 지문 수필(수기) 진해자 바다의시간 수필(수기) 박호선 부표의 귀띔 164 page 주최 해양수산부 주관 울산지방해양수산청 울산항만공사 한국항로표지기술원